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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시력 ㅣ 매드 픽션 클럽
카린 포숨 지음, 박현주 옮김 / 은행나무 / 2014년 11월
평점 :
절판
글래스 키 상(Glass Key Award, 스칸디나비아 추리작가협회에서 북유럽 작가의 최우수 범죄소설에 수여하는 상)을 수상한 작가의 이력과 인격 장애를 겪는 사이코패스가 벌이는 살인사건이라는 내용만 놓고 보면 분명 스릴러로 분류되는 것이 맞는 작품이지만,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의 느낌은 독특한 심리물 한 편을 읽은 듯한 복잡다단한 심경이었습니다. 화려한 표현이나 속도감을 앞세우지도 않은데다 ‘누가 범인인가?’라는 미스터리보다는 “내게 여자가 있다면...”을 끊임없이 되뇌며 사랑을 갈구하는 고독한 사이코패스 릭토르의 불안정한 심리와 기이한 행동들을 느린 속도로 파고드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릭토르는 뢰카 요양원에서 임종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들을 돌보는 간호사입니다. 동료인 안나를 흠모하며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순정남이기도 하지만, 그는 노인들의 약을 변기에 버리고 무력한 그들을 고문하는 사이코패스이기도 합니다. 또 쉬는 시간엔 공원에서 사람들을 관찰하며 한없는 고독에 빠지는 고독남이기도 합니다.
그런 릭토르가 세 건의 죽음에 휘말립니다. 눈앞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목격하지만 직접 돕지도, 경찰에 연락하지도 않습니다. 우발적이긴 해도 직접 사람을 살해하고 매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던 중 요양원에 입원해있던 한 노인의 죽음을 수사하던 경찰에게 살인범으로 체포되기에 이릅니다.
미스터리는 ‘릭토르의 살인-매장이 어떻게 밝혀질 것인가’와 ‘요양원의 노인을 죽인 자는 누구인가?’ 등 두 갈래로 진행되는데, 책을 읽는 내내 이 두 개의 미스터리에 대한 궁금증은 그리 크게 일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 건의 죽음을 대하는 릭토르의 불안정하고 변화무쌍한 심리 상태가 독자의 눈길을 훨씬 더 강하게 잡아당깁니다.
그는 어둠 속에서 사물을 볼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죽음을 앞둔 노인을 고문하고 시신 앞에서 광기어린 춤을 추는 등 죽음에 이끌리는 일그러진 본능을 지니고 있습니다. 스스로 극한의 고독을 택했으며, 특별한 트라우마도 없이 악의와 선의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저지른 범죄 때문에 마음을 졸이고, 사랑하는 여인 때문에 가슴 설레는 모순된 면모를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명백히 악마적인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독자는 그의 범죄가 드러나지 않기를, 그래서 그가 꿈꾸는 사랑이 이뤄지기를 응원하게 되는 묘한 입장에 놓이게 됩니다.
좀 과장된 해석일 수도 있지만, ‘릭토르의 모순’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공통된 기질일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누구나 악의와 선의를 조금씩은 공유하고 있기 마련이고, 폭력을 통해 자기보다 약한 자를 지배하려는 욕구가 있는가 하면, 거기에서 자라난 자신감을 바탕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필하고 싶어 합니다. 믿었던 것에 대한 배신감으로 인해 한순간 이성이 무너지기도 하고, 한없이 강한 척 허세를 부려보지만 돌아서선 이내 겁에 질린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누구나 다 조금씩은 릭토르처럼 살아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다만 릭토르는 공동체가 허락하는 범위를 벗어났기 때문에 사이코패스로 분류된 것이고, 실제로 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했기 때문에 공동체에 의해 제재당한 것뿐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번역 후기의 마지막 문장에 특히 공감할 수 있었는데...
“릭토르가 몰랐던 것은 누구나 어둠 속에서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다만 대부분의 사람은 그 어둠이 얇은 얼음과 같다는 것을 알고 그 속에 발을 내딛지 않을 뿐이다. 모두가 고독을 알지만 그 안에 빠지지 않으려 애쓰는 것처럼.”
다 읽고도 이 작품의 원제 ‘나는 어둠 속에서 볼 수 있다’ (I can see in the dark)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고, 지금도 그 의미를 다 이해했다고 할 순 없지만, 번역 후기의 이 마지막 문장 덕분에 조금이나마 작가의 의도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스릴러를 기대했던 독자에겐 좀 고통스러운 책읽기가 될 수도 있지만, 짧은 여름과 긴 겨울을 지닌 북유럽의 스산한 심리물이라고 생각하고 읽다보면 의외로 매력적인 캐릭터나 줄거리와 만나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