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막 난 시체의 밤
사쿠라바 카즈키 지음, 박재현 옮김 / 21세기북스 / 2012년 7월
평점 :
품절


15년 전 고서점 2층에 머물며 지독히도 가난했던 학생 시절을 보낸 한 남자가 있습니다. 그는 재력가의 사위가 되었고, 비상근 강사로 일하며 번역 일을 겸하고 있습니다. 다들 그의 처지를 부러워하지만 정작 그는 혐오와 무시 속에 투명인간처럼 살아갈 뿐입니다. 그에겐 아내 모르는 큰 빚이 있고 여러 소비자금융을 통해 돌려막고 있는 중입니다.

어릴 적, 가족이 파탄나면서 가난의 수렁에 빠진 여자가 있습니다. 멋모르고 쓰기 시작한 대출이 사채에 이르면서 그녀는 고서점 2층으로 도망쳤습니다. 그곳에서 남자를 만난 그녀는 무색무취한 섹스를 나누며 그에게 돈을 요구합니다. 그녀의 삶을 결정하는 유일한 가치는 돈입니다.

이 두 남녀가 한여름에 만나 한겨울에 영원히 결별하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돈과 정욕으로 얽힌 만남이었고 토막 살인으로 종결되지만, 씁쓸하고 마음 아픈 사랑 이야기처럼 긴 여운을 남깁니다.


 

내 남자소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직업에 이어 사쿠라바 카즈키와의 세 번째 만남입니다. 제목만 보면 끔찍한 연쇄살인마가 등장하는 잔혹 미스터리 같지만 실제 이야기는 돈에 얽힌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면서 동시에 죽음에 이르는 치명적인 사랑’, ‘죽음에서 시작된 기이한 인연을 함께 다루고 있어서 사쿠라바 카즈키답게 여러 장르를 믹스한 듯한 묘한 뉘앙스를 풍깁니다.

 

어느 날 갑자기 느닷없고 의미 없는 섹스로 시작된 요시노 사토루와 시로이 사바쿠의 관계는 사랑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정욕만을 위한 만남도 아닌 기이한 인연입니다. 두 계절에 걸쳐 드문드문 이어지던 관계는 이 끼어들면서 급격히 비틀어지기 시작합니다. ‘은 두 사람 모두에게 있어 단순한 화폐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사토루에게 은 영혼을 거둬간 악마이자 굴욕의 대가이며 가족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밑바닥 삶을 사는 사바쿠에게 있어 은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티켓입니다.

 

그들의 관계가 파국으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지만, 사쿠라바 카즈키는 그들의 파국을 돈을 놓고 벌이는 치정살인극따위로 다루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대놓고 거품경제의 후유증을 다루는 고발극처럼 유치하게 전개하지도 않습니다. ‘내 남자소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직업에서도 그랬듯이 사쿠라바 카즈키는 참담한 현실과 예정된 비극을 너무도 담담하고 예쁘게 그립니다. 또 독자로 하여금 그들의 고단한 삶을 훤히 들여다보게 만들고, 파국이 뻔한 두 사람의 관계가 통속극처럼 잘 풀렸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갖게 만들고, 그들의 현실을 지배하고 있는 망할 놈의 돈이라는 욕이 저절로 나오게 만들다가 결국 파국이 다가왔을 땐 너무나 안타까운 나머지 화까지 나게 만듭니다.

 

사쿠라바 카즈키는 다양한 상징과 대비를 동원하여 독자의 공감을 배가시킵니다. 두 사람은 습하고 기분 나쁜 한여름에 만나 살을 파고드는 한겨울의 혹한 속에 헤어집니다. 사토루의 아내의 집은 흰 요새처럼 웅장하고, 침실은 우주선 조종석을 떠올릴게 할 만큼 넓고 견고하고 청결합니다. 하지만 사토루와 사바쿠가 공유하던 고서점 2층은 누가 계단이라도 밟으면 파도위의 배처럼 흔들리고, 열리지 않는 둥그런 세 개의 창만 있는 너무나 외로운 방입니다. 또 후광이 드리운 여신 같은 아내는 하얗고 고른 치열을 지녔지만, 사바쿠는 누렇고 더럽고 제멋대로인 치열 덕분에 더러운 구멍 같은 입을 갖고 있습니다. 아내와 집이 온통 하얀 색이라면, 사바쿠의 모든 것은 불길하고 희망 없는 암적색입니다. 이런 여러 가지 상징과 대비들 덕분에 현실감은 또렷해지고, 감정은 깊이 이입됩니다.

 

내용과 묘사 뿐 아니라 형식적인 면에서도 사쿠라바 카즈키만의 묘한 매력이 엿보이는데, 일반적인 사용법을 무시한 채 곳곳에 찍어놓은 쉼표들은 독자들의 호흡과 일반적인 눈 운동을 방해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 템포에 맞춰 책을 읽다 보면 문장과 행간에 깔린 작가의 의도를 얼핏 목격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아 무척 거슬리지만 그 엇박자의 리듬을 타면 쉼표 하나만으로도 문장의 맛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흥미롭게 지켜볼 수 있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꽤 뒤죽박죽인 이상한 인간이라 생각했는데, 여기서 이렇게 토막 시체가 된 것을 보니 묘하게도 비로소 사람다워 보이고 차분해진 것 같았다. 뭐랄까, 안정적인 모습이 되었다. 그래. 이 사람은 예전부터 토막 나 있었다. 살아서 움직이고 있었지만 토막 시체 같은 사람이었다.”

 

프롤로그에 실린 이 글에서는 누가 토막 난 시체인지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책을 읽는 내내 누가 누구를 토막 냈는가?’가 무척 궁금했는데, 정작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러서는 실은 누구였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등장인물 모두 살아있지만 토막 시체 같은 사람들이라는 먹먹한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단순히 에 지배당하고, 놀아나다가 파멸에 이르는 이야기도 아니고, 비현실적으로 그려진 치명적인 신데렐라 이야기도 아닙니다. 그리 긴 분량의 작품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구구절절 긴 서평을 쓰게 만들 정도로 사쿠라바 카즈키는 여러 가지 화두를 독자에게 던집니다.

 

사쿠라바 카즈키의 작품은 독자의 호불호를 많이 타는 편이고, 특히 그리 말끔한 기분으로 마지막 페이지를 덮지 못하게 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런 여러 가지 느낌과 여운을 남겨주는 작품에 취향이 있어서 그런지 그녀의 작품이라면 늘 기대감을 갖고 찾아보게 됩니다. 다만 너무 자주, 연이어 읽는 것은 팬인 저로서도 그리 권하고 싶진 않습니다. 몇 달 또는 한 1년 쯤 후에 아직 못 읽은 그녀의 아카쿠치바 전설을 읽을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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