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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 속의 소녀들
톰 롭 스미스 지음, 박산호 옮김 / 노블마인 / 2014년 11월
평점 :
절판
농장에서의 은퇴생활을 위해 런던을 떠나 스웨덴으로 간 다니엘의 부모 크리스와 틸데. 하지만 불과 몇 달 후 다니엘은 두 사람 때문에 큰 충격에 빠집니다. 런던으로 돌아온 어머니 릴데는 스웨덴의 농장 일대에서 벌어진 범죄에 관한 확실한 물증과 단서를 갖고 있으며 아버지 크리스가 용의자 중 한 명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어머니의 망상이 도를 넘었고, 그녀의 말은 모두 거짓이며 음모라고 주장합니다.
평생 싸움 한 번 한 적 없는 완벽한 커플이었던 이들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다니엘은 스웨덴에서 벌어진 일은 물론 지금껏 몰랐던 부모의 비밀과 어머니가 유년기에 겪은 끔찍한 사건에 대해서도 알게 됩니다. 스웨덴 농장 일대에서 벌어진 사악한 범죄에 관한 어머니의 진술은 사실일까? 어머니를 극도의 망상증을 앓는 정신병자로 여기는 아버지의 판단은 사실일까? 어머니의 유년기였던 1963년 여름과 올 여름에 벌어진 사건은 무슨 연관이 있는 걸까? 다니엘은 진실 대 거짓의 싸움을 종결짓기 위해 모종의 결단을 내립니다.

톰 롭 스미스는 “‘차일드 44’ 3부작과 ‘얼음 속의 소녀들’ 모두 가족 간의 사랑과 믿음과 비밀에 대한 이야기이며, 삶의 어두운 순간을 싸워서 극복하는 것이 공통된 주제”라고 언급했습니다. 하지만 ‘차일드 44’도 그랬듯이 이 작품 속의 ‘가족 간의 사랑과 믿음과 비밀’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거운데다 잔혹한 비극성을 지니고 있고, ‘삶의 어두운 순간을 싸워서 극복하는 과정’은 너무나도 지난하고 고통스러울 따름입니다. 완벽해 보이던 부부가 이국에서 보낸 4개월여 만에 ‘목격자 對 용의자’로 갈라서고, 외아들 다니엘은 그 가운데에서 어느 한 편을 선택하기를 강요받습니다. 더구나 ‘가족을 위한 싸움’의 과정에서 다니엘은 갈수록 더 큰 강도의 비밀과 고통을 만나게 될 뿐입니다.
어머니의 진술을 토대로 재구성된 중반부까지의 스웨덴에서의 사건일지는 조금은 답답하게 읽힐 정도로 장황합니다. 페이지는 느리게 넘어가고, 문장은 평범하거나 만연체의 톤을 유지합니다. 하지만 마지막 100여 페이지에서 드러나는 톰 롭 스미스의 진가는 말 그대로 압권입니다. 아, 이래서 톰 롭 스미스구나, 라는 감탄이 저절로 흘러나오고 연이은 반전과 비밀의 폭로는 흥분과 속도감을 최고조로 끌어올립니다. 다니엘에 의해 밝혀지는 끔찍한 과거사와 진실들을 지켜보고 있으면 초반부에 물음표를 떠올릴 정도로 느껴졌던 동어반복과 지루함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왜 그렇게 탄탄한 기초공사가 필요했는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광활하고 차가운 스웨덴의 숲과 호수, 농장지대를 이야기의 주 무대로 설정한 것은 이 작품의 맛을 제대로 내게 한 최고의 레시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끝도 없이 펼쳐진 소나무와 전나무의 숲, 웬만큼 작은 나라보다 더 크고 맑은 심연의 호수, 거기에서 태어난 신비하면서도 공포감으로 가득 찬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트롤 신화, 그리고 고즈넉해 보이기도 하지만 때론 음습한 기운을 내뿜는 오래된 농장 등을 배경으로 한 진실 대 거짓의 대결, 비밀과 상처에 관한 이야기는 독자의 긴장감과 호기심을 배가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원제가 왜 ‘The Farm’인지는 책을 다 읽고 나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게 됩니다)
톰 롭 스미스의 신작을 기다리면서 당연히 ‘차일드 44’ 2편과 3편이 먼저 나올 것이라 여겼기에 ‘얼음 속의 소녀들’의 출간은 조금은 의외였지만, 그의 진면목을 다시 발견한 것 같아 반가웠고 기대 이상의 만족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기다리던 ‘차일드44’ 3부작의 나머지 두 편이 2015년에 연달아 출간된다고 하니 이보다 더 반가운 소식은 없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