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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여, 내 손을 잡아라 ㅣ 밀리언셀러 클럽 10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10월
평점 :
절판
고문, 토막, 책형 등 다양하고 끔찍한 수법의 살인이 연이어 발생합니다. 피해자들은 살해되기 전 살인예고장을 받아들었고, 어떤 식으로든 사립탐정 패트릭 켄지와 인연이 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FBI를 통해 20여 년 전인 1974년에 벌어진 연쇄살인과의 유사점을 알게 된 켄지는 당시 범인으로 체포되어 복역 중인 알렉 하디먼을 만납니다. 그리고 현재 벌어지고 있는 연쇄살인에 하디먼이 결부돼있으며, 하디먼 외에 또 다른 누군가가 배후 또는 수하에 있음을 파악합니다. 하지만 수사가 지지부진한 상태에서 동료 탐정인 제나로에게까지 살인예고장이 날아들었고, 켄지와 사랑에 빠진 그레이스와 그녀의 딸 메이마저 위기에 빠집니다.

시리즈물의 경우 대체로 ‘어느 작품부터 먼저 읽어도 상관없다’고들 하지만 ‘켄지&제나로 시리즈’는 (겨우 두 편만 읽은 상태지만) 순서대로 읽어야 제 맛을 느낄 수 있는 작품입니다. ‘어둠이여~’는 켄지와 제나로의 삶과 사랑, 그 속에 녹아있는 트라우마와 공포(아버지가 남긴 켄지의 트라우마, 폭력남편 필립으로 인한 제나로의 고통과 공포)가 사건 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전작인 ‘전쟁 전 한 잔’을 읽지 않았다면 사건과 캐릭터를 따라가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둠이여~’는 잔혹한 연쇄살인마를 쫓는 사립탐정 켄지와 제나로의 활약이 메인 스토리지만 그에 못지않게 등장인물들 간의 우정, 사랑, 증오 등 20년도 넘게 이어져온 악연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고, 세대가 바뀌어도 지워지지 않는 끔찍한 과거사가 사건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어서 단순한 오락 스릴러라기보다는 두 세대에 걸친 방대한 비극적 연대기의 느낌까지 줍니다.
특히 주인공 켄지의 고통스러운 삶의 궤적이 이야기의 큰 축을 차지하는데, 그는 여전히 아버지가 남긴 정신적, 물리적 상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고, 누구보다 폭력을 증오하지만 그 자신 역시 폭력의 유전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 때문에 끊임없이 자책하고 괴로워합니다. 더구나 자신이 저지른 폭력으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들이 일생일대의 위기에 빠지자 자책감은 임계점 가까이까지 치솟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고 싶은 평범한 남자이면서 동시에 폭력의 유전자로 가득 찬 괴물이기도 한 이중성은 켄지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은 물론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거나 떠나가게 만듭니다. 심지어 파트너인 제나로마저 패닉에 가까운 공포에 빠지자 켄지는 이번 사건을 마지막으로 탐정생활을 정리할 생각까지 갖게 됩니다.
켄지의 곁에서 폭력의 절정을 목격한 제나로의 전 남편 필립은 이런 말을 합니다. “패트릭, 어떻게 이런 일을 하는 거야? 어떻게 네 자신을 용서하고 사는 거냐?” 켄지를 사랑하지만 그를 잠식한 폭력에 질려버린 그레이스는 이런 말을 합니다. “자긴 늘 그런 사람들과 어울려. 그들과 함께 폭력의 세계에 살고 있는 거라고.”
가장 아쉬웠던 점은 조금은 모호하거나 혼란스러웠던 연쇄살인의 동기입니다. 어떻게 보면 20년 전부터 꼼꼼하게 계획된 복수일 수도 있고, 달리 보면 살인을 즐기는 사이코패스의 무차별 연쇄살인일 수도 있는데, 전자라면 범행 동기가 선명해야 하지만 후자라면 굳이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어둠이여~’는 두 가지가 모호하게 섞인 느낌이 있어서 다 읽고도 “그럼 왜 그 사람들을 죽인거지?”라는 의문이 깨끗하게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저의 이해력 부족이거나 지나친 속독의 영향일 수도 있지만, 머릿속에서 이런저런 생각들이 엉킨 채 서평을 쓰려니 그저 난감할 뿐입니다.
피와 살이 난무하고, 할리우드 액션물에 못잖은 속도감 있는 전개 때문에 책장은 휙휙 넘어가지만 켄지와 제나로의 삶을 지켜보는 것이 안쓰럽고 힘들다 보니 진실이 드러나고 악이 처단되는 마지막 장에 이르러서도 통쾌함과 시원함보다는 씁쓸함과 불편함이 더 크게 자리 잡았습니다. 물론 그것이 켄지와 제나로의 다음 이야기를 기대하게 만드는 가장 큰 동력이라는 점은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말입니다.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된 채 한때 사무실을 폐쇄하고 치유의 날들을 보내던 두 사람이 다음 이야기에서는 어떤 모습들을 보여줄지 무척 기대됩니다.
사족이지만... 시리즈 첫 편인 ‘전쟁 전 한잔’에서 ‘부끄러움 잘 타는 폭력적인 무정부주의자’라고 느껴졌던 부바는 수다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말이 많아진 것은 물론 단순히 ‘폭력적인 성격’을 넘어 소름이 돋을 만큼 뼛속까지 폭력의 DNA로 가득 찬 캐릭터로 변신했습니다. 어떤 독자는 부바의 활약이 켄지와 제나로 이야기만큼이나 재미있었다고 평했는데, 저 역시 동감하면서도 ‘부끄러움 잘 타는 폭력적인 무정부주의자’라는 부바만의 독특한 면모가 휘발된 점은 아쉬울 뿐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