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
가와무라 겐키 지음, 이영미 옮김 / 오퍼스프레스 / 2014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서른 살의 나이에 뇌종양 4기를 선고받는다면? 그런 내 앞에 울긋불긋한 하와이언 셔츠를 입은 유쾌 발랄한 악마가 나타나 세상에서 뭐든 한 가지를 없애면 생명을 하루 연장해주겠다고 제안해온다면? 그런데 악마가 선택한 없애야 할 그 무엇이 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이라면?

 

시한부 선고, 유쾌한 악마, 생명 연장의 거래, 소중한 것의 소멸 등 꽤 독특한 판타지 소재들을 모아 삶과 죽음에 관한 새로운 시선을 그린 작품입니다. 시한부 환자의 클리셰나 상투적인 이야기로 도배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억지 희망을 위해 비현실적인 해피엔딩을 동원하지도 않았지만, 이야기는 빛과 그늘을 자유자재로 오가며 한 개인의 소소한 삶을 되돌아보게 해줍니다.


 

생명 연장을 대가로 악마가 소멸시키겠다고 선언한 대상들은 주인공에겐 나름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것들이라 매번 갈등을 불러일으킵니다. 편리함 대신 추억을 쌓아갈 시간을 앗아갔던 ‘OO’, 어릴 적부터 주인공의 삶을 지탱하고 형성시켜온 ‘OO’, 그리고 지나간 시간과 기억들을 상징하는 ‘OO’ 등이 그것입니다. 아이러니한 점은 생명 연장의 대가로 소중한 것들이 소멸되는 것을 지켜보던 주인공이 그제야 오랫동안 잊고 있던 일들 - 고양이 양배추와 동거하게 된 계기, 자신의 마지막 시간까지 가족들을 위해 내줬던 어머니와의 온천 여행, 틀어질 대로 틀어져 지금은 절연이나 다름없이 지내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 가볍고 텅 빈 사랑만 나눴던 첫사랑 등 - 을 떠올리게 된다는 점입니다.

 

죽음을 앞두고서야 얻은 평범하지만 소중한 깨달음과 새삼 느끼게 된 회한 속에서 하루하루 연장된 삶을 살아가던 주인공에게 어느 날 생각의 전환점이 찾아옵니다. “뭔가를 얻으려면, 뭔가를 잃어야겠지.”라는 어머니의 말씀을 떠올린 그는 죽는 것이 두렵긴 하지만 뭔가를 소멸시켜가면서까지 살아가는 건 더 괴롭다는 자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 시점에서 (제목에서 눈치 챌 수 있듯) 악마가 다음 소멸대상으로 고양이를 지정하자 주인공은 타인보다 조금 짧게 주어진 수명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남은 시간 동안 자신이 반드시 마쳐야 할 한 가지 미션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절박함과 애틋함이 메인 정서이긴 하지만, B급 코미디나 만담을 연상시키는 유쾌한 캐릭터의 악마, 일시적으로 말을 할 수 있게 된 고양이 양배추’, 그리고 첫사랑과 오래된 친구 등 주인공의 삶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던 조연들 덕분에 이야기는 시한부 환자의 참회록 같은 우울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독자는 주인공과 조연들이 나눴던 소중한 시간들, 안타까운 순간들, 후회되는 상황들을 차분하게 지켜볼 수 있게 됩니다. ‘죽음을 주제로 삼았지만 결국엔 에 대한 따뜻하고 감동적인 여운을 남기면서 이야기는 마무리됩니다.

 

생명연장을 거래하는 유쾌한 악마말하는 고양이등 일부 판타지 설정도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고, 누구나 잘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정작 그때가 되어야 절실하게 깨닫게 되는 것들에 대해 강요하지도, 과장하지도 않은 채 담담하게 묘사한 작가의 필력은 비슷한 주제의 논픽션이나 실화보다 더 깊은 울림을 전해줬습니다.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었다고 하면 다소 어폐가 있는 표현이지만, 그것이야말로 이 작품이 가진 가장 큰 미덕이라고 여겨집니다. 따뜻한 햇살과 그 아래 펼쳐진 풍경이 아름답게 여겨지는 한가한 오후에 이 작품을 읽는다면 주인공의 마지막 일주일이 좀더 독자들의 마음 깊이 공명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