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30일생 소설NEW 1
김서진 지음 / 나무옆의자 / 2014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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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모임 때문에 고향인 J시를 찾은 현재는 한때 불륜관계였던 혜린과 우연히 만납니다. 그런데 1주일 후 혜린이 살해당하고, 현재는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당합니다. 가까스로 혐의를 벗지만 현재는 연고도 없는 J시에서의 혜린의 행적이 의문스러울 따름입니다. 살해당하기 직전 혜린이 만났던 한 여인을 시작으로 현재는 혜린의 동선을 하나씩 되밟아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혜린이 J시에서 만났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할아버지 정윤조와 관련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정윤조는 J시의 정신적 지주이자 상징적인 인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아내를 방치한 채 수많은 여자들과 염문을 뿌렸던 희대의 바람둥이이기도 합니다. 현재는 혜린이 만났던 사람들을 통해 할아버지 정윤조와 관련된, 지난 60여 년간 봉인되어 온 비밀들을 하나둘씩 목격하게 됩니다. 그리고 혜린의 죽음이 그 비밀들을 푸는 과정에서 벌어진 사건임을 깨닫습니다.

 

230일이라는, 존재할 수 없는 날에 태어난 한 여자의 죽음에서 출발한 이야기지만 작가가 펼쳐놓은 서사의 폭은 60여 년이라는 시간만큼 깊고 방대합니다. 전쟁의 시대를 겪은 사람들의 추악하지만 절실했던 욕망을 뿌리삼아 작가는 권력, 이기심, 탐욕, 성욕, 살인, 시기, 질투, 치정(癡情) 등 인간의 밑바닥에 있는 본능들을 민낯 그대로 내보입니다.

 

그 중심에는 정윤조-정태훈-정현재로 이어지는 3대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할아버지 정윤조는 칠순에 이르러서도 남의 여자를 넘보던 희대의 바람둥이였고, 아버지 정태훈은 처제와 부적절한 관계를 가진 이력이 있습니다. 아들 정현재는 임신한 아내를 둔 채 함께 일하던 혜린과 몸을 섞었고, 아내는 뱃속의 아기를 지키면서 정씨 집안을 상대로 소송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3대가 공유한 불륜과 치정의 유전자는 60여 년에 걸친 비극의 이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그저 한 쌍의 남녀가 금지된 영역에서 쾌락을 맛보는 데서 그친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 여러 사람의 인생을 끝장내거나 큰 상처를 입혔기 때문입니다. ‘60여 년에 걸친 현대사의 비극불륜과 치정이라니, 물과 기름 같기도 하고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아이러니한 조합이 아닐 수 없지만, 작가는 생생한 캐릭터, 적절히 배치된 사건, 베일에 싸인 과거사를 정교하게 구성함으로써 이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발휘할 수 있는 최대의 무게감과 리얼리티를 이끌어냅니다.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설정은 기억과거에 관한 것인데, 혜린을 살해한 혐의를 받은 현재는 술만 마시면 필름이 끊기는 증상을 갖고 있습니다. 덕분에 혜린이 살해된 시점의 기억을 몽땅 잃어버렸고, 어쩌면 정말 자신이 혜린을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동시에 현재는 혜린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만난 사람들에게 길게는 60년부터 짧게는 20년 전의 일들을 기억해내라고 다그칩니다. 사라진 자신의 기억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면서도 타인의 기억 한 조각을 얻기 위해 폭주하는 현재의 이중적인 모습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작가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흐름을 캐릭터들의 이름을 통해 묘사하기도 합니다.

 

할아버지는... 나에게는 현재에 충실히 살라는 의미로 현재’, 여동생에게는 항상 앞을 생각하라는 의미로 미래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나는 어디선가 과거라는 이름을 가진 형제가 튀어나올지 모른다며 농담을 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기억과거를 우회적으로 강조하는 사건이나 캐릭터가 종종 등장하는데, 독자에 따라 작위적이라 여길 수도 있고 이질감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작가의 의도를 효과적으로 독자에게 전달한 매력적인 설정으로 보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과거는 그냥 흘러가지 않는다. 내버려두어도 스스로 일어난다.”는 출판사의 소개글은 아주 잘 뽑힌 한 줄의 카피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양파 껍질처럼 벗길수록 새로운 모습을 드러내는 현재의 진실들과 고구마 줄기처럼 아무리 뽑아내도 끝없이 뽑혀 나오는 과거의 진실들, 그리고 그에 발맞춰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의 역겹거나 안타까운 죽음들이 적잖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오차 없이 직조된 덕에 하루 만에 마지막 장까지 달릴 수 있었습니다.

김서진의 첫 작품인 선량한 시민역시 좋은 평을 받았다고 들었는데, 두 번째 작품인 ‘230일생을 읽고 나니 첫 작품을 찾아보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만한 서사를 꼼꼼하고 빈틈없이 요리한 필력으로 미뤄볼 때 그녀의 첫 작품 역시 큰 기대를 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작가의 후기 중 이 작품의 작의를 압축한 부분을 인용하며 서평을 마치겠습니다.

 

뻔뻔함과 노골적인 욕망을 지닌 지독한 악당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우리와 비슷한 모습이면서 오히려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인물을... 동시에 우리 시대의 분위기, 핵심을 드러낼 수 있는, 또 그를 통해 현대사 60년을 관통하는 키워드가 욕망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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