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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로열 - 제149회 나오키상 수상작
사쿠라기 시노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9월
평점 :
절판
훗카이도 동부 구시로 외곽의 습지 일대에서 30년을 버텨온 호텔 로열의 일대기와 함께 호텔 로열을 세우고, 드나들고, 지키고, 끝내 문을 닫아야 했던 여러 사람들의 사연이 서로 다른 색깔을 지닌 일곱 편의 연작 단편에 실려 있습니다. 에피소드들이 시간 순으로 배열되진 않았지만, 첫 에피소드 ‘셔터 찬스’가 이미 오래 전 폐허가 된 호텔 로열을 무대로 삼고 있고, 마지막 에피소드 ‘선물’이 호텔 로열을 세우기로 결심한 창업주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서 호텔 로열의 과거를 향해 조금씩 시간여행을 하는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처자식을 버리고 자신의 나이의 절반 밖에 안 되는 여인과 함께 호텔 로열을 세운 다이키치, 제대로 된 부부 침실 하나 없는 가난한 삶 속에서 가족마저 해체 직전의 위기에 몰렸다가 우연히 들른 호텔 로열에서 쾌락과 희망을 얻은 메구미-신이치 부부, 호텔 로열에서 청소부로 일하며 지난한 삶을 묵묵히 견뎌내는 미코, 호텔 로열 창업자 다이키치의 딸이면서 자신의 손으로 호텔의 문을 닫게 된 마사요, 폐허가 된 호텔 로열에서 누드 사진을 찍는 연인 다카시와 미유키 등 일곱 개의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겐 하나같이 눈물겹거나 애틋하거나 아니면 따뜻하거나 서늘한 사연들이 있습니다.
30년이라는 시간도 시간이지만 인적 드문 습지에 자리 잡은 러브호텔이라는 무대는 그곳을 세우고 지켜온 사람들의 이야기는 물론 짧게는 2시간, 기껏해야 며칠 동안 그곳을 스쳐갔던 각양각색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 있는 드라마틱한 공간입니다. 그곳은 공허한 원나잇 스탠드나 아슬아슬한 불륜 등 다양한 형태의 애증이 공존하는 곳이며, 밤낮으로 타인들의 정사의 잔재를 쓸고 닦아야 하는 고된 노동을 감수하는 사람부터 삶의 막장에 이르러 도피를 위해 숨어든 사람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인간 군상들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들에게는 묘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몰락 끝에 폐허에 이른 호텔 로열을 닮은, 즉 자신의 의지만으로는 지금 겪고 있는 곤란에서 쉽게 헤어날 수 없다는 무력감, 그렇다고 누군가에게 도움의 손길을 청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소외감, 그리고 결국 습지 같은 현실에 항복한 채 주어진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열패감 등입니다. 때로 꿈이나 희망이 엿보이기도 하지만 그 역시 밝은 미래를 담보하진 못합니다. 책 소개글에선 등장인물들의 공통점을 ‘결핍’이라고 칭했는데, 간결하지만 가장 적확한 표현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사쿠라기 시노는 이런 극적인 무대와 캐릭터들을 일곱 개의 이야기 속에 과장하지도, 억지로 꾸미지도 않은 채 잘 조합해냈고 그 결과 때로는 웃음을, 때로는 눈물을, 때로는 한숨을 자아내게 만들면서 독자들의 마음을 잔잔하게 흔들어놓습니다. 그리고 이런 담담함과 처연함이 149회 나오키상 수상의 동력이 됐으리라 여겨집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작가 자신이 홋카이도 구시로에서 태어났으며 실제로 그녀의 아버지가 '호텔 로열'이란 러브호텔을 경영했다는 점입니다. 게다가 그곳에서 성장한 것은 물론 객실청소까지 한 적이 있다고 하니 어쩌면 이 작품에 등장하는 몇몇 인물들은 소녀 시절의 작가의 눈에 비쳤던 인물들을 모델로 삼은 것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수록된 작품마다 제각각 다채로운 개성을 지니고 있어서 딱히 어느 작품이 더 재미있거나 인상적이라고 꼽긴 어렵지만, 창업주의 딸 마사요가 호텔 로열의 문을 닫는 날에 벌어진 이야기를 그린 ‘쎅꾼’과 호텔 로열에서의 거품 목욕을 잊지 못하는, 삶에 찌든 중년 여인의 사연을 담은 ‘거품 목욕’, 그리고 호텔 로열 창업자의 유골 공양을 맡은 주지승 아내의 기구한 삶을 그린 ‘금일 개업’이 개인적으로 호감이 많이 가는 작품이었습니다.
기억에 오래 남을 또 한 권의 연작 단편집을 만나 볼 수 있어서 반가웠고, 사쿠라기 시노라는 빼어난 작가를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어서 더욱 더 반가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