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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끝, 혹은 시작
우타노 쇼고 지음, 양억관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1년 11월
평점 :
절판
이웃의 아들, 딸이 유괴를 당하든 말든, 누군가 옆집 담벼락에 스프레이로 육두문자 낙서질을 하든 말든, 심지어 핵폭탄이 일본 열도에 또다시 떨어지든 말든 내 가족, 내 집만 안 다치면 알 바 아니라는 마흔 살 남자 도가시 오사무. 스스로 이기주의자임을 자인하면서도 그것이 행복을 위한 올바른 삶의 태도라 믿던 그에게 어느 날 날벼락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사춘기를 겪고 있긴 하지만 남다른 우등생인 6학년 아들 유스케가 최근 벌어진 초등학생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아직 아무도 진실을 모르는 상태에서 도가시는 아들의 무고함을 입증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닙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유스케의 범행은 확고해질 뿐입니다. 결국 도가시는 앞으로 벌어질 지옥 같은 상황에서 한 발짝이라도 벗어날 수 있는 모든 가능한 방법을 떠올려봅니다.

누구나 극단적인 위기에 처하면 그것을 타개하기 위한 모든 수단을 상상하기 마련입니다. 한없이 이기적인 도가시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아들 유스케가 저지른 끔찍한 범행을 확인하곤 극과 극을 달리는 상상에 휩싸입니다. 어떻게든 이 위기를 타개하고 평범한 생활로 돌아가는 상상에서부터 ‘모두 함께 죽거나 아니면 유스케를 희생해서라도 자신과 가족은 살아남거나...’라는 극단적인 상상에 이르기까지 도가시의 머릿속은 뒤죽박죽이 됩니다. 동시에 당장 해결해야 할 현실의 문제 때문에 골머리를 앓기도 합니다.
우타노 쇼고는 ‘도가시가 처한 끔찍한 현실’과 ‘도가시가 품는 일그러진 상상’이라는 두 이야기 덩어리를 교묘하게 또는 모호하게 이어붙임으로써 독자에게 혼란과 호기심을 동시에 던집니다. 물론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상상인지 ‘친절히’ 알려주긴 하지만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어느 새 현실과 상상의 경계는 다시 모호해집니다. 현명한 독자라면 금세 그 경계를 눈치 채겠지만, 우타노 쇼고 식 서술의 매력은 약간의 ‘아둔함’을 겸비해야 제 맛을 느낄 수 있기에 스스로를 한심한 독자라고 여기면서도 그 덕분에 이 작품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다만, 어딘가 계몽적인 냄새까지 살짝 풍기는 결말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다른 독자의 서평들 가운데 결말에 대한 호불호를 언급한 경우가 꽤 많았는데, 대체로 ‘무책임하다’는 의견과 ‘생각할 여지를 많이 남겼다’는 의견으로 갈렸습니다. 두 입장 모두 일정부분 동감할 수 있었지만, 현학적이거나 계몽적이거나 심지어 두루뭉술해 보이는 양비론을 내세운 점은 마땅치 않았습니다. 독자 입장에선 풍자든 비난이든 찬사든 ‘뭔가’를 기대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무리는 좀 아쉬웠지만, 전반적으로는 우타노 쇼고의 필력을 맛볼 수 있는 괜찮은 작품이었습니다. 이 작품을 읽고 “이게 뭐야?”라고 반문할 독자도 분명 있겠지만, 또 개인적인 잣대로 봤을 때 작품마다 편차가 좀 있는 작가임은 분명하지만, 정형의 틀을 깬 독특함과 혼란스러움 속에 숨어있는 색다른 재미를 원한다면 가끔 간식처럼 우타노 쇼고를 꺼내보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그러다가 그의 매력에 빠져들게 된다면 얼마든지 주식으로 삼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