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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맨션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6
오리하라 이치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14년 9월
평점 :
절판
오리하라 이치가 펼쳐놓은 트릭의 향연을 마음껏 맛볼 수 있는 연작 단편집입니다. 낡고 퇴락한 4층짜리 연립주택에 그랜드맨션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여놓은 것부터 오리하라 이치의 ‘삐딱한 비틀기’의 전조가 느껴집니다. 모두 7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그랜드맨션에 거주하는 다양한 인물들이 각 수록작에서 주인공을 맡아 이야기를 끌어갑니다.
등장인물들 역시 전혀 ‘그랜드’하지 않은 캐릭터들인데, 이런저런 사연으로 홀로 사는 독거노인, 아내에게 이혼 선고를 들은 중년의 실직자, 맨션에서 쫓겨나기 직전의 미스터리 마니아, 성질 괴팍한 관리인, 불법 거주자, 사기꾼 등 대부분 사회적 약자 또는 음습하거나 의심스러운 인물들입니다. 이들은 함께 산 지 몇 년이 지나도록 이름조차 모른 채 지내고, 겉으로는 웃으며 인사를 나눠도 뒤돌아서는 흉보고 의심하고 증오하며 살아갑니다. 또한 층간 소음, 불법침입, 절도, 살인, 전화사기, 스토킹 등 온갖 종류의 범죄가 난무하여 오래된 4층짜리 연립주택을 한시도 바람 잘 날 없게 만듭니다.

오리하라 이치는 7편의 작품을 통해 시간에 관한 트릭(선의의 제삼자), 공간에 관한 트릭(304호 여자), 또 시공간을 한꺼번에 무너뜨리는 트릭(마음의 여로, 리셋) 등 다양한 서술트릭의 만찬을 선보입니다. 그의 전작들을 읽어본 독자로서, 그리고 트릭에 넘어가지 않겠다는 전의(?)로 가득찬 독자로서 어느 한 줄도 대수롭게 읽어선 안 되며 특히 별 것 아닌 듯 툭툭 튀어나오는 단서를 헛되이 지나쳐선 안 된다는 점을 잘 알면서도 결국엔 번번이 그에게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후반에 실린 ‘옮긴이의 말’을 읽곤 오리하라 이치의 서술트릭에 ‘대처’하기 위한 당연하고도 뻔한 전략을 또다시 간과했다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각 단편에서 누누이 서술되는 글을 특별히 잘 기억해두길 바란다. 작가가 반복하는 일에는 반드시 이유와 비밀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눈을 똑바로 뜨고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잠깐만 주의를 게을리 하면 작가가 곳곳에 놓은 덫에 걸려 허우적대다 자신의 무릎을 치는 수밖에 없다.”
매번 마지막 장에 이르러 “아, 그거였구나!”라고 뒷북을 치는 것이 서술트릭을 읽는 재미지만, 나름 한두 편 정도는 아슬아슬하게나마 작가를 앞서가고 싶은 욕심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 작품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일단 이번에도 오리하라 이치에게 완패했음을 자인해야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선의의 제삼자’, ‘마음의 여로’, ‘리셋’이 가장 마음에 들었습니다. 사방에 절묘한 트릭들을 흩어놓은 채 시공간을 마음껏 주무르는 이야기들이라 재미있게 읽기도 했지만, 동시에 잔잔하거나 애틋한 여운도 함께 만끽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리하라 이치의 트릭에 빠져든 채 허우적대다 보면 금세 마지막 장에 이를 정도로 가독성이 높고 단편으로서의 미덕도 잘 살아있는 작품입니다. 일부 인물들을 계속 활용한다면 ‘그랜드맨션 2관’이라는 후속작도 얼마든지 가능할 것 같은데 제 바람대로 돼 줄지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