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어둠 속의 일격 ㅣ 밀리언셀러 클럽 136
로렌스 블록 지음, 박산호 옮김 / 황금가지 / 2014년 9월
평점 :
8명의 여자를 살해한 루이스 피넬이 9년 만에 체포됩니다. 하지만 그는 피해자 가운데 한 명인 바버라 에팅거만은 자신과 무관하다고 주장합니다. 실제로 그녀가 살해됐을 당시 루이스 피넬의 알리바이는 완벽했고, 그녀의 아버지 찰스 런던은 매튜 스커더에게 딸의 죽음의 진실을 의뢰합니다. 하지만 천하의 매튜 스커더라도 9년이나 지난 사건을 조사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바버라 에팅거가 살던 아파트의 이웃들, 그녀의 전 남편과 여동생, 직장동료는 물론 같은 브루클린에서 루이스 피넬에게 살해된 희생자와 그 관련자들까지 탐문하지만 매튜 스커더의 손에 들어오는 명확한 증거나 목격담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의뢰인 찰스 런던이 수사 중단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매튜 스커더는 그와 무관하게 수사를 계속 진행했고,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단서를 얻어 진범을 찾아내는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진범이 밝힌 바버라 에팅거 살해 동기는 그동안의 탐문을 무색하게 할 만큼 어처구니없고 충격적이었습니다.
‘매튜 스커더 시리즈’의 네 번째 작품입니다. 다 읽고 난 후의 느낌이라 결과론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미스터리나 스릴러에서 원톱 주인공이 이끄는 시리즈의 경우 대략 4~5편쯤 이르면 작가들이 한번쯤 주인공의 숨겨진 개인사라든가 마음 깊이 끌어안고 있는 고뇌나 갈등을 심도 있게 다루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전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마이클 코넬리의 ‘해리 보슈 시리즈’의 네 번째 작품인 ‘라스트 코요테’를 읽었을 때도 비슷한 느낌을 받은 기억이 있습니다.
‘어둠 속의 일격’은 사건 만큼이나 매튜 스커더의 평탄하지 않은 삶에 많은 분량을 할애합니다. 그가 경찰을 그만둔 사연이라든가 아내와 아이들과 떨어져 살고 있다는 사실은 전작들에서도 조금씩 설명돼왔지만, 이번에는 거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옆에서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회한에 가득 찬 채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매튜 스커더를 만날 수 있습니다.
이번에 매튜 스커더가 맡은 사건은 관련자들에게 9년 전의 기억을 되살릴 것을 요구하는, 따라서 당연히 벽에 부딪히거나 무리한 추정에 기댈 수밖에 없는 사건입니다. 어쩔 수 없이 탐문과 자료조사는 방향성이나 계획성 없이 진행됩니다. 당연히 매튜는 몇 번씩이나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나?’ 자문하게 되고, 헛고생을 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는, 또 내가 왜 이러고 살고 있나, 라는 그의 자괴감은 그를 수없이 많은 바(bar)와 술집으로 몰고 가 버번의 늪 속에서 허우적거리게 만듭니다.
기억이 맞는다면 그가 완전히 필름이 끊어질 정도로 취한 것은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어둠 속의 일격’에 등장하는 매튜 스커더는 짧지만 애틋한 로맨스를 나눈 재니스 킨과 함께 알코올 중독 치료 모임에 나가는 것이 필요해 보일 정도로 자주 엉망진창이 되곤 합니다. 오죽하면 ‘인생에서 도망친 주정뱅이’라는 묘사까지 동원될 정도입니다.
그의 빠지지 않는 버릇 중 하나인 ‘길거리에서 시비 붙기’ 역시 이번엔 완전히 상대를 잘못 골랐거나 명백히 오버한 상황으로 묘사됩니다. 또한 이혼한 전처 애니타를 통해 함께 기르던 애완견 밴디가 죽은 소식을 듣게 되는데, 이혼했지만 두 사람을 연결해주던 몇 안 되는 끈 중 하나였던 밴디의 죽음은 매튜 스커더의 자괴감을 더욱 깊고 쓰리게 만드는 에피소드입니다. 정리하자면, 그는 자신에 대한 통제력을 잃은 채 헤어날 수 없는 진창에 빠져들었고, 때로는 자신을 망가뜨리려고 일부러 자해하는 듯한 인상까지 주면서 말 그대로, 총체적인 난국에 빠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런 설정들은 매튜 스커더를 혼란에 빠뜨림으로써 스스로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게 만들려는 작가의 명백한 의도로 보이는데, 그런 탓인지 사건은 꽤 흥미롭고 궁금증을 유발하게끔 시작됐지만 해결 과정이나 진범 찾기는 ‘우연’이나 ‘설정’에 기대는 부분이 많아 보였고, 분량에 있어서도 사건보다는 ‘매튜 스커더 수난사’에 더 방점을 찍은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기존의 매튜 스커더 팬들에겐 오늘도 어디에선가 버번 또는 버번을 넣은 커피를 마시고 있을 고독하고 불안정한 뉴요커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흥미롭게 읽히겠지만, 이 작품이 매튜 스커더와의 첫 만남인 독자라면 자칫 당혹감만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리즈의 첫 작품인 ‘아버지들의 죄’부터 순서대로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매튜 스커더의 ‘하드보일드 또라이’ 캐릭터를 제대로 맛보려면 전작들이 필수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