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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들의 죄 ㅣ 밀리언셀러 클럽 127
로렌스 블록 지음, 박산호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8월
평점 :
뉴욕의 한 아파트에서 24살 웬디 해니포드가 난자당한 시신으로 발견됩니다. 웬디의 동거남 리처드 밴더폴은 피를 흠뻑 뒤집어쓴 채 거리에서 난동을 부리다가 체포됐지만 얼마 안 돼 유치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웬디의 아버지 케일은 무면허 탐정 매튜 스커더에게 최근 3년간 연락 한 번 없던 딸의 죽음에 대해 조사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언론에서는 웬디를 창녀로 짐작했지만 아버지 케일의 기억 속에 웬디는 순수하고 모범적인 외동딸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변 인물들을 탐문하던 스커더는 웬디와 리처드의 기이한 인생에 적잖이 놀랍니다. 특히 학생 때부터 아버지뻘의 남자에게 빠져들곤 했던 웬디가 목사 집안 출신의 동성애자 리처드와 동거하게 된 계기에 집중합니다.
2013년 겨울에 시리즈 두 번째 작품인 ‘죽음의 한가운데’를 먼저 읽었고, 9개월이 지나서야 주인공 매튜 스커더의 원점인 시리즈 첫 편 ‘아버지들의 죄’를 읽게 됐습니다. 고백하자면 이 달(2014년 9월) 들어 두 편의 작품(‘살인과 창조의 시간’, ‘어둠 속의 일격’)이 한꺼번에 출간된 덕분에 그동안 깜빡하고 있던 이 시리즈가 생각난 것입니다. ‘진실 찾기’라는 탐정물의 공식에 충실하지만 ‘아버지들의 죄’는 가치관의 혼란이 극에 달했던 1970년대 미국 사회의 중산층에서 일어났을 법한 극단적인 가족의 비극을 생생하게 그려낸 사회 소설이기도 합니다.
웬디와 리처드는 성장과정에서 아버지 혹은 아버지로 대변되는 가족들과 불행하거나 기이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악연을 맺어왔습니다. 웬디의 생부는 그녀가 태어나기도 전에 한국전쟁에서 전사했고, 계부인 케일은 뜻하지 않은 ‘사건’ 때문에 웬디에게 어정쩡한 거리를 둔 채 지내왔으며, 어린 시절 어머니를 잃은 리처드에게 있어 목사인 아버지는 그저 권위적이고 차갑고 보수적인 존재일 뿐이었습니다. 또한 웬디는 또래 남자들에게 관심이 없었고, 리처드는 여자에게 관심이 없었습니다. 웬디는 정서적으로 쉽게 무너질 수 있는 순수함을 지닌 반면 남자들과의 관계만큼은 매춘으로 오해받을 만큼 자유분방함을 추구했고, 리처드는 수줍고 얌전한 성격과 달리 게이 바에서는 매일 같이 섹스파트너를 찾아다니곤 했습니다.
결코 평범하거나 일반적이라고 할 수 없는 인생 경로를 택했던 웬디와 리처드의 삶은 적잖은 부분에 있어 아버지들의 영향을 받은 결과물들입니다. 그 영향들을 전부 ‘죄’라고 낙인찍을 수는 없는 일이지만, 어쨌든 작가는 이 작품의 제목을 ‘아버지들의 죄’로 명명함으로써 두 사람의 비극적인 삶과 최후가 아버지들로부터 시작되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한껏 멋을 부렸으면서도 냉혹하고 건조하기 이를 데 없는 마초적인 문장들도 그렇지만, 역시 하드보일드 작품들을 매력 있게 만드는 첫 번째 요소는 주인공의 캐릭터입니다. 시리즈 2편인 ‘죽음의 한가운데’에서도 그랬지만 ‘아버지들의 죄’ 역시 매튜 스커더가 경찰을 그만두게 된 계기나 이후 그가 살아온 날들에 대해서는 그다지 친절하게 설명되지 않고 있습니다. 단 몇 줄, 그것도 감정 같은 건 아예 실리지 않은 평범한 대화 속에 잠시 언급될 뿐입니다.
다만 소소한 몇몇 에피소드들을 통해 그에 대한 호기심이 좀더 부풀어 오른 게 사실인데, 가령 스트레스가 임계점을 넘어서는 순간 극도의 폭력을 휘두르는가 하면, 한없이 친절하다가도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며 “닥쳐!”라는 한마디로 상대를 제압하기도 합니다. 반면 과할 정도로 성실하게 십일조를 내고 희생자들을 위해 초를 밝히는가 하면, 전처인 애니타나 아이들에게 이혼의 간극을 메우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에게 딸린 별명 중 ‘알코올 중독 탐정’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사실 이 작품에선 버번을 아주 맛있게 스트레이트 또는 커피에 타 마시는 장면이 나올 뿐 중독에 가깝다는 면모는 아직 드러나지 않습니다. 가장 예상 못한 매튜 스커더의 진면목은 마지막 엔딩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사건의 진상을 모두 파악했지만 수사권도, 사법권도 없는 무면허 탐정 매튜 스커더가 ‘아버지들의 죄’에 내리는 마지막 ‘판결’은 요즘 작품에서도 보기 힘들 정도로 파격적입니다.
이 작품은 미국에서 1976년에 출간됐고, 작품 속 시간적 배경은 1973년입니다. 요즘 작품들에 비해 분량도 짧고(238페이지) 사건의 규모도 크진 않습니다. 하지만 이야기의 완성도나 비밀의 깊이와 무게, 캐릭터의 매력 등은 어마어마한 스케일을 자랑하는 현대물에 비해 결코 빠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짜임새는 더 촘촘하고 긴장감과 쫄깃함으로 꽉꽉 채워진 작품입니다. 또 짧은 분량이지만 한 줄 한 줄 작가가 흘려놓은 정보들이 지뢰밭처럼 흩어져 있어서 집중하지 않고 후루룩 읽어 넘겼다간 나중에 “어?”하게 되는 상황과 마주칠 수도 있습니다.
새삼 먼저 읽은 ‘죽음의 한가운데’에게 야박한 서평을 남긴 게 미안해집니다. 아무래도 매튜 스커더의 매력을 제대로 음미하지 못할 만큼 빠른 속도로 책장을 넘겼던 것 같고, 나중에라도 느리고 꼼꼼한 책읽기로 재도전한다면 처음엔 알아보지 못한 진가를 제대로 맛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새로 출간된 ‘살인과 창조의 시간’, ‘어둠 속의 일격’ 역시 각각 1976년, 1981년 작품이지만, ‘아버지들의 죄’만큼 요즘의 작품들을 능가하는 완성도와 재미를 줄 것으로 믿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