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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허한 십자가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선희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2011년 9월에 출간된 ‘새벽 거리에서’ 이후로 ‘공허한 십자가’ 이전까지 최근 만 3년 간 국내에 소개된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은 16편입니다. 그 가운데 10편의 작품을 읽었고, 2편은 만족, 3편은 so-so, 나머지는 기대 이하였습니다. 예전 같으면 앞뒤 안 가리고 무조건 읽곤 했지만, 이제는 신간이 나오더라도 서평이나 블로그의 반응을 보고 선택 여부를 결정할 정도로 히가시노 게이고에 대한 신뢰를 많이 잃은 것이 사실입니다.
올 들어서만 7편이 폭주하듯 쏟아져 나왔는데, 그나마 두 작품 - ‘한 여름의 방정식’, ‘몽환화’ - 이 그동안의 실망감을 어느 정도는 해소해 준 덕분에 나름 기대감을 갖고 ‘공허한 십자가’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공허한 십자가’는 손에 꼽을만한 그의 몇몇 작품들의 미덕을 ‘조금씩’ 골고루 겸비한, 즉 논란의 여지가 많은 사회적 메시지를 전면에 내세운 채 열심히 살아가거나 맹렬히 싸우거나 또는 무력하게 침몰되는 개인들의 이야기를 복잡한 서사 속에 녹여냄으로써 이것저것 생각할 여지를 많이 남기는 작품입니다.
일본의 사법 시스템에 대한 정면 도전(방황하는 칼날), 소중한 인연이자 동시에 저주받은 악연으로 오랜 시간동안 엮였던 두 남녀(백야행, 환야), 가족을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물(붉은 손가락), 그리고 ‘용의자 X의 헌신’과 ‘성녀의 구제’에서 보여준 비극 속의 애틋함 등 히가시노 게이고의 전작에서 인상 깊었던 다양한 코드들이 잘 버무려져있습니다.

‘공허한 십자가’는 살인과 속죄, 그리고 사형제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살인은 분명 용서받지 못할 죄이고, 그에 준하는 벌을 받아야 할 죄입니다. 하지만 그 벌로서의 사형에 대해서 히가시노 게이고는 세 가지 입장을 제시합니다.
①사형반대론자인 범인의 변호사 : “(범인의) 사형이 집행된 이후 (유족에게) 뭔가 달라진 게 있나요? 사형판결은 그(범인)를 바꾸지 못했지요. 사형은 무력(無力)합니다.”
②가족을 살해한 범인의 사형을 강력히 주장하는 유족들 : “사람을 죽인 사람의 반성은 어차피 공허한 십자가에 불과한데, 그를 공허한 십자가에 묶어두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사형의 최대 장점은 그 범인은 이제 (더 이상) 누구도 죽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③살인은 했지만 다른 방법으로 속죄해온 자를 변호하는 사람 : “교도소에서 반성도 하지 않고 아무런 의미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과 현실 속에서 다른 사람을 구하면서 사는 것, 무엇이 진정한 속죄라고 생각하세요?”
세 가지 입장 모두 일정부분 이해가 되지만 동시에 쉽게 수긍할 수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네 명의 주인공은 이 난해한 상황에 어떤 식으로든 얽혀있습니다. 21년 전 아직 철없던 시절에 사랑과 비극을 동시에 잉태했던 후미야&사오리, 11년 전 딸 마나미를 강도의 손에 잃고 이혼을 택한 나카하라& 사요코. 이들은 피살자로, 피살자의 유족으로, 살인자로, 속죄자로 등장하여 살인-속죄-사형이라는 정답 없는 난제 속에 내던져집니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고루하고 평면적인 사형제도 찬반론 대신 서로 입장이 엇갈리는 인물들의 사연을 복잡하게 직조함으로써 미스터리의 미덕과 사회성 짙은 화두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노립니다. 또한 독자로 하여금 이율배반적인 감정을 갖게 만드는데, 가령 주인공의 진실 찾기가 성공하기를 바라면서도 한편으론 실패하기를 바라게 만들고, 살해당한 자의 사연은 안타깝지만 진범이 꼭 잡혀야 할까, 조바심나게 만들기도 하고, 마지막에 이르러 살인자의 정체가 드러났을 때엔 그냥 묻어두고 싶은 마음까지 들게 합니다. 그 덕분에 다 읽은 뒤에도 독자는 개운한 느낌을 가질 수 없습니다. 도대체 누구의 손을 들어줘야 할지, 누구의 입장을 이해해야 할지, 죄와 벌이란 과연 인간의 영역에서 논의하는 것이 가능한 일인지 등 심난한 자문에 사로잡히기 때문입니다.
과거 히가시노 게이고에게 열광했던 시절의 작품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공허한 십자가’는 부조리하지만 마땅한 해법을 찾을 수 없는 사회적 딜레마와 그로 인해 고통과 절망 속에서 허우적대야 하는 개인의 문제를 잘 녹여냈고, 특히 인물들이 서로 얽히는 과정을 긴장감과 재미를 곁들여 직조해낸 덕분에 오랜만에 작가의 힘을 느낄 수 있었던 수작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다만, 초중반부까지 눈에 거슬렸던 조금은 어설퍼 보이는 번역이 옥의 티였습니다. 초중등생의 눈높이에 맞춘 듯한 짧고 평이한 단문들과 직역의 느낌이 든 문장들 때문에 초보 번역자의 데뷔작인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지만, 표지를 보니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품을 많이 번역한 이선희의 작품이라 좀 의외였습니다. 원작이 그렇게 쓰인 탓일 수도 있고, 처음 접한 전자책의 레이아웃 때문에 그렇게 느껴졌을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초중반부까지의 가볍고 쉽고 짧은 문장들이 아쉽게 읽힌 것은 사실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엔터테이너 기질과 폭발적인 다작을 좋아하는 독자도 있겠지만, 사회적 문제를 픽션 속에 제대로 버무릴 줄 아는 그의 탁월한 필력을 좋아하는 저로서는 이후의 차기작들이 그런 맥락을 놓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의 신작을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는 것은 당분간은 여전하겠지만, ‘공허한 십자가’의 완성도와 만족감이 이어진다면 그 역시 극복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