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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치바 ㅣ 이사카 코타로 사신 시리즈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소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5월
평점 :
절판
후속작 ‘사신의 7일’이 6년 만에 출간된다는 소식에, 한참 전에 읽었던 ‘사신 치바’의 따뜻했던 기억이 문득 떠올라 서평도 써볼 겸 오랜만에 책장에서 다시 꺼내들었습니다.
치바는 인간의 죽음을 결정하는 사신이면서도 정작 인간이나 죽음 자체엔 별 흥미가 없으며 오로지 좋아하고 즐기는 것은 음반매장에서 헤드폰을 통해 음악을 듣는 것뿐입니다. 미션을 수행할 때면 예외 없이 비가 내려 치바는 파란 하늘을 본 적이 없습니다. 잠도 안 자고, 피로도 못 느끼며, 감각이 없어 음식의 맛이나 통증도 못 느낄 뿐 아니라 미션에 따라 그때그때 나이나 외모가 달라지는, 일찍이 본 적이 없는 독특한 신입니다.
정보부에서 ‘죽을 사람’을 지정하면 조사부에 속한 치바 같은 사신들이 그들과 접촉합니다. 일주일 간 두세 번 정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곤 상부에 가(可) 혹은 보류라고 보고하는데 가(可)일 경우 예정대로 죽음이, 보류일 경우 좀더 연장된 삶이 그들 앞에 주어집니다.
스토커에 쫓기는 오피스레이디, 복수를 눈앞에 둔 야쿠자, 폭설로 고립된 산장 여행객, 로맨스를 꿈꾸는 미남 청년, 살인을 저지르고 도주길에 나선 청년, 그리고 바닷가 미용실을 지키고 있는 70대 노파 등이 치바가 만난 ‘죽을 사람’들입니다.
좀 장황하지만 치바의 캐릭터를 나름대로 정리해보면, ‘피도 눈물도 없는 로봇 혹은 시니컬하기 짝이 없는 하드보일드 탐정 같지만, 그런 차갑고 뻔뻔한 얼굴로 배꼽 잡는 블랙코미디를 구사하는 캐릭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처음 읽었을 때나 다시 읽었을 때나 인간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치바의 대사와 독백 덕분에 몇 번씩이나 유쾌하게 웃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죽음을 역설적으로 또는 맘껏 비틀어 다루는 일본만의 독특한 문법은 소설 뿐 아니라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자주 만나볼 수 있는데, ‘사신 치바’는 그 가운데서도 눈에 뛸 만큼 개성을 지닌 작품입니다.
목차와 첫 에피소드를 읽고 나니 남은 에피소드들에 대한 몇 가지 기대감이 떠올랐습니다. 뻣뻣하고 고지식한 치바도 한번쯤은 툭하고 부러지거나 자신이 혐오하던 ‘인간의 감정’을 경험하는 기회가 오지 않을까? 그래서 기어이 독자의 마음과 눈물샘을 한번쯤은 후두둑 무너지게 하지 않을까? 그리고 치바가 시공간을 초월하여 등장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여섯 편의 수록작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어디쯤에선가 치바와 재회하지 않을까? 이런 기대감은 예상대로 맞아들었고, 만족감은 기대했던 것 이상이었습니다.
‘사신 치바’는 지독한 블랙코미디와 훈훈한 ‘인간극장’이 잘 믹스된 듯한, 그래서 읽고 나면 마음이 한없이 따뜻해질 뿐 아니라 심지어 죽음조차 누구나 겪게 되는 삶의 한 부분이라고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기분 좋은 작품입니다. 후속작 ‘사신의 7일’은 장편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잘 짜인 연작 단편에서의 치바의 두 번째 활약을 기대했던 것이 사실이지만, 장편에서도 치바의 이야기는 여전히 매력적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 수록작 평점
① 사신의 스토커 리포트 ★★★★★
② 사신의 하드보일드 ★★★★★
③ 사신의 탐정소설 ★★★
④ 사신의 로맨스 ★★★★
⑤ 사신의 로드무비 ★★★★
⑥ 사신의 하트워밍 스토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