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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소녀
미셸 뷔시 지음, 임명주 옮김 / 달콤한책 / 2014년 7월
평점 :
품절
1980년 12월, 프랑스와 스위스의 국경지대에서 비행기 추락사고로 생후 3개월 여아를 제외한 전원이 사망합니다. 두 가족이 여아의 혈연임을 주장하면서 18년에 걸친 비극이 시작됩니다. 한쪽은 어마어마한 부자인 카르빌 가문이고, 다른 한쪽은 가난한 비트랄 가문입니다. “아이 이름이 리즈로즈 카르빌이냐, 에밀리 비트랄이냐?”를 놓고 프랑스를 뒤흔든 재판이 벌어지고, 양쪽의 이름을 따 ‘릴리’라 불리던 아이는 가난한 비트랄 가문의 혈연으로 판정 납니다. 하지만 아이를 빼앗긴 카르빌 가문은 사립탐정 그랑둑을 고용하여 아이를 되찾아 올 계획을 세웁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18년에 걸친 그랑둑의 조사가 진행되고, 1998년에 이르러 그랑둑은 사건의 진상을 담은 일기장을 남긴 채 자살을 시도합니다.
그랑둑에게서 일기장을 받아본 에밀리는 오빠 마르크에게 문제의 일기장을 전하곤 종적을 감춥니다. 이야기는 그랑둑의 18년 동안의 기록과 그것을 읽는 오빠 마르크의 현재 상황이 교차되면서 진행됩니다. 오빠지만 에밀리를 사랑했던 마르크는 일기장에 담긴 믿을 수 없는 이야기 앞에서 한없이 좌절하고 분노하다가 기어이 진실을 찾는 위험한 여정에 나섭니다.
2012~2013년에 걸쳐 프랑스에서 주요 추리문학상을 많이 받은 작품이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을 때의 느낌은 그 이상의 깊고 묵직한 여운이었습니다. 적잖은 인물들이 스스로 또는 타의에 의해 목숨을 잃는데다 베일에 싸인 비밀을 캐는 이야기라 장르물로 분류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한 사람의 기구한 운명이 바닥까지 파헤쳐지는 것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뭐랄까,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새삼 깨닫게 만드는, 그만큼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휴먼스토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랑둑의 일기장으로 인해 에밀리로 살아온 지난 18년의 정체성이 송두리째 흔들리면서 혼란에 빠진 ‘릴리’는 말할 것도 없고, 여동생이지만 여동생이 아니길 바라면서 그녀를 사랑해온 오빠 마르크는 ‘릴리’ 못잖은 큰 충격에 휩싸입니다.
사립탐정 그랑둑은 ‘릴리’의 할머니인 마틸드 카르빌로부터 그녀가 성인이 될 때까지 18년 동안 매년 10만 프랑의 보수를 받으며 ‘릴리’를 빼앗아 올 단서를 잡아야하는 입장이었지만, 오히려 ‘릴리’를 비롯한 비트랄 가문의 가족들과 따뜻한 인연을 맺게 됩니다.
소중한 손녀와 여동생을 비트랄 가문에게 빼앗긴 할머니 마틸드와 언니 말비나는 거의 광기에 서린 ‘릴리 되찾기’에 나서는데, 특히 말비나의 경우 동생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성장 거부증’에 걸릴 정도였고, 겁 없이 총을 휘두를 만큼 반미치광이로 24살의 나이에 이릅니다.
비극적인 비행기 사고가 두 가문에게 남긴 트라우마는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지독했고, 18년이 지나 모든 진실이 드러날 때까지 너무나 많은 참극과 상처를 남겼습니다. 작가는 오빠 마르크가 읽는 그랑둑의 일기장 내용과 진실이 드러나는 현재의 3일 간의 급박한 상황을 교차하여 배치함으로써 독자의 긴장감과 호기심을 극적으로 끌어올립니다. 또한 양쪽 집안의 인물들을 포함한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하는 살인사건을 설정했는데, 마지막에 이르러 독자의 예상을 깨는 범인을 드러냄으로써 반전의 효과는 물론 이야기의 비극성을 한층 더 깊게 만듭니다.
과연 ‘릴리’는 어느 가문의 피를 이어받았는지, 양쪽 가문 사이에서 딜레마에 빠진 그랑둑이 알아낸 진실은 무엇인지, 그 많은 희생자들은 왜, 누구에게 목숨을 빼앗겨야 했는지, 그리고 마르크와 ‘릴리’의 멜로는 비극적인 근친상간으로 막을 내릴 것인지 등 마지막 페이지에 이를 때까지 수많은 의문들이 미궁인 채로 독자를 유혹합니다. 더불어, 거듭되는 막판 반전은 단번에 끝까지 완주해온 독자의 뒤통수를 쉴 새 없이 두드리며 수많은 ‘왜?’라는 질문에 대해 명쾌한 해답을 보여줍니다.
미셸 뷔시의 여섯 번째 장편이지만 한국에는 처음 소개되는 작품입니다. 외국작가의 한국 데뷔작은 출간순서와 무관하게 가장 뛰어난, 혹은 가장 대중적인 작품이 선택되곤 하지만, 이만한 필력이라면 미셸 뷔시의 다른 작품들에도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잔혹한 연쇄살인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독자가 볼 때 ‘비극적이긴 해도 심심한 가족사’ 정도로 오해할만한 여지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림자 소녀’는 웬만한 미스터리나 스릴러보다 더 독하고 진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어지간해선 실망할 일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