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변호사 - 붉은 집 살인사건 어둠의 변호사 시리즈 1
도진기 지음 / 들녘 / 201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비틀린 인연으로 맺어진 후 갈등과 불화 속에 살다가 기어이 여러 사람의 목숨을 참혹하게 잃어야만 했던 비극적인 3대의 이야기가 불온한 기운을 내뿜는 오래된 벽돌 외관의 양옥집을 무대로 펼쳐집니다. 조부모 대에 일어났던 광기 서린 부부간의 살인사건에 이어 부모 대에 이르러서는 강도의 행각으로 추정되는 참사가 일어났고, 이제 비극은 자식 대에까지 그림자를 드리웁니다.

제도권의 법 집행에 환멸을 느껴 판사를 그만두고 어둠의 변호사를 자청한 고진은 서초경찰서 강력팀장 이유현과 함께 붉은 벽돌집의 비밀을 풀기 위해 뛰어듭니다. 하지만 수사는 번번이 벽에 부딪히고, 용의자의 알리바이는 철벽같고 범행 동기는 그저 모호할 뿐입니다. 더구나 수사가 진행되던 중 연이어 살인사건이 일어나자 고진은 그때까지 당연한 사실로 여겨온 모든 단서와 전제들을 뒤집기에 이릅니다.

 

신간 유다의 별’(‘고진 시리즈네 번째 작품)을 계기로 그동안 소문만 들어왔던 도진기의 작품을 접하게 됐습니다. ‘유다의 별을 읽기 전에 시리즈 전부를 읽기는 어렵더라도 주인공 고진의 데뷔만큼은 지켜봐야 할 것 같아서 어둠의 변호사 : 붉은 집 살인사건을 펼쳐들었습니다.

 

범인과 피해자 모두 일가족 중에 있다는 설정 하에 진실을 찾는 내용이다 보니 밀도와 긴장감은 높은 반면 이야기의 폭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작가는 붉은 집 가족들의 캐릭터를 있는 대로 비틀어 설정함으로써 그 한계를 극복합니다. 재혼으로 인한 두 가정의 합체, 입양 이후 태어난 친자식, 이해가 엇갈리는 유산상속 외에 불륜, 별거, 시기, 질투 등 가족이라는 틀 안에서 벌어질 수 있는 모든 불행을 마약, 광기, 살인이라는 참극과 버무려냅니다.

하지만 이런 설정은 마지막에 진실이 드러나고 진범이 잡히더라도 통쾌함보다는 불편한 여운만 남기 마련입니다. 본문에서도 고진은 정의가 실현됐다는 만족감이 아니라 인간의 악의와 탐욕에 대한 진절머리 끝에 남는 덧없음과 허허로움만을 느낀다고 묘사되어 있는데, 작가는 독자의 불편한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 마지막 반전 카드를 마련해놓았습니다.

 

마지막에 이르러 진범과 진실이 밝혀지는 과정에서도 두어 차례 반전이 이어지지만, 가장 매력적인 반전은 어둠의 변호사 고진의 실체가 드러나는 장면입니다. 그가 왜 판사라는 제도권의 안정된 자리를 박차고 나왔는지, 죄와 벌에 대한 그만의 철학은 무엇인지를 독자에게 암시해주는 순간인데, 덕분에 덧없음과 허허로움은 어느 새 사라지고 오히려 앞으로 이어질 시리즈에서의 고진의 활약을 무척 기대할 수밖에 없게 만듭니다.

 

사실 읽는 동안 고진의 캐릭터 때문에 조금 오락가락한 적도 있긴 합니다. 주로 함께 수사하는 이유현의 입을 통해 묘사되곤 하는데, 고진은 무척 게으르고 매사에 무심한 편이며 30대지만 50대 같은 인상을 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건에 연루된 20대 여성에게 빠진 나머지 평소 고진답지 않은 열정 넘치는 수사를 펼치기도 합니다. 또 고전적인 탐문과 알리바이 조사에만 주력하다 보니 중반부까지는 그만의 독특한 색깔을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결국 후반에 이르러 고진만의 뛰어난 관찰력과 추리력이 발휘되고, 왓슨 앞의 홈즈처럼 조금은 거만한 자세로 진실을 밝히면서 그의 진짜 매력이 드러나지만 아무튼 초중반까지는 기대가 너무 컸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쉬운 부분들이 있었습니다.

 

정리하자면, 고진의 캐릭터라든가 동어반복식으로 전개되는 알리바이와 탐문, 또 일부 캐릭터의 무리한 설정 등 아쉬운 점들은 있었지만, 앞으로 이어질 시리즈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하기엔 모자람이 없는 데뷔작이었습니다. 신간 유다의 별을 먼저 읽어야 하는 상황이라 시리즈 2~3편인 라 트라비아타의 초상정신자살은 건너뛰게 됐지만, 기회가 되는대로 도진기의 나머지 작품들도 Must-Read 아이템에 넣어놓을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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