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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별장의 모험 ㅣ 닷쿠 & 다카치
니시자와 야스히코 지음, 이연승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4년 5월
평점 :
품절
닷쿠와 다카치, 보안 선배와 우사코 등 4총사는 R고원으로 떠난 여행길에서 기이한 별장과 마주합니다. 먼지 하나 없을 정도로 깔끔한 내부에는 세간은 물론 사람의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고, 그저 싱글침대와 냉장고 속의 96개의 맥주캔이 전부였습니다. 4총사는 무단침입의 죄도 잊은 채 냉장고 속의 맥주를 마시며 별장의 정체와 용도에 대해 밤샘 논쟁을 벌입니다.
다음날 저녁, 집으로 돌아온 4총사는 맥주와 수면부족으로 파김치가 된 몸을 이끌고 다시 보안 선배의 집에 모여 끝장 토론에 들어갑니다. 아무도 반박 못할 정도로 명쾌한 다카치의 추론 덕분에 4총사의 논쟁은 마무리 될 뻔 했지만, 마지막에 이르러 닷쿠는 모두의 가설을 무너뜨리고 전혀 새로운 결론에 도달합니다.
‘맥주별장의 모험’에 앞서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국내 출간작 3편을 모두 읽었고, 매 작품마다 기발한 설정과 이야기를 만날 수 있어서 작가의 뇌구조에 흥미를 느껴왔지만, “독자 여러분께서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어떤 표정을 지으실지 정말이지 궁금합니다.”라는 출판사의 소개글이 괜한 엄살(?)이나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절실히 공감할 정도로 ‘맥주별장의 모험’은 흔히 보기 어려운 실험적이고 파격적인 작품이었습니다.
줄거리에서도 엿볼 수 있듯 ‘맥주별장의 모험’은 전형적인 안락의자 탐정물입니다. 사건 현장엔 가보지도 않고 관계자의 진술도 듣지 않은 채 단지 추론만으로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장르를 뜻하는데, 이 작품에서 4총사에게 주어진 단서는 그저 맥주와 침대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기괴한 별장이라는 ‘공간’뿐이고, 그러다 보니 논쟁은 사건의 진상과는 전혀 무관하게 100% 상상에 의해서만 전개됩니다.
불륜 남녀의 밀회 장소라는 주장부터 포르노 도촬을 위한 세팅, 아이를 유괴하거나 벌주기 위한 준비, 친구를 놀라게 할 깜짝쇼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상상 가능한 모든 스토리가 만취한 안락의자 탐정들에 의해 제기됩니다. “진상 따위 아무래도 좋아.”, “실제로 어떻게 됐는지 같은 건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아.”라는, 독자들을 당황하게 만드는 멘트들과 함께 말입니다.
말하자면, 무슨 사건인지, 사건이 맞긴 맞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4총사가 벌이는 일종의 극단적인 논리 대결이 메인스토리입니다. 안락의자 탐정물을 그리 선호하지 않는 취향 때문에 쉽게 몰입하긴 어려웠지만, 4총사가 돌아가며 내놓는 가설과 논리의 맹점을 찾아내기 위해 머리에 쥐가 나도록 한 글자 한 글자 유의해가며 읽는 것은 색다른 재미이긴 했습니다.
읽으면서, 또 다 읽고 난 후에도 도대체 작가는 왜 이런 작품을 쓸 생각을 했을까, 라는 의문을 품었는데, 후반부의 ‘작가의 말’에 그 대답이 나와 있습니다. 니시자와 야스히코는 “안락의자 탐정소설은 현재 진행 중인 범죄사건을 다루는 것은 기술적으로 무리다.”라는 명제에 도전하고 싶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즉 스스로 무모할지도 모른다고 여기면서도 논리의 극한까지 달려보기 위해 새로운 도전을 시도했던 것입니다. 이런 실험성과 파격성은 독자들의 호불호를 극단적으로 갈라놓을 수밖에 없는데, ‘맥주별장의 모험’은 그 간극이 여느 작품보다 무척 클 것으로 보입니다. 즉 ‘끊임없이 가설을 제시하고 무너뜨리고 쌓아가는 과정을 즐기는 작품‘이라는 번역자의 설명에 눈길이 끌리는 독자에게는 희귀한 수작이 되겠지만, 보편적인 ‘진범 찾기 미스터리’를 즐기는 독자에게는 조금은 곤혹스런 책읽기가 될 것입니다.
대중적인 면에서 전작들만큼의 호응은 얻지 못할 수 있지만, ‘맥주별장의 모험’은 니시자와 야스히코가 왜 ‘헨(変) 본격의 귀재’라 불리는지 그 이유를 제대로 보여준 작품임에 틀림없습니다. (헨 본격=독특하거나 특이함을 뜻하는 헨(変)과 본격미스터리의 합성어입니다)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차기작 ‘어린 양들의 성야’는 4총사의 첫 만남과 당시 벌어진 충격적 사건을 다루고 있다고 합니다. 그들의 ‘비기닝’에는 어떤 비밀과 충격이 실려 있을지, 또, 어떤 새로움과 독특함으로 그 무렵이 묘사됐을지 벌써부터 궁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