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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계곡 ㅣ 모중석 스릴러 클럽 35
안드레아스 빙켈만 지음, 전은경 옮김 / 비채 / 2013년 10월
평점 :
절판
악천후로 뒤덮인 알프스의 지옥계곡 철제 다리에서 라우라 바이더가 추락사합니다. 추락 직전 아슬아슬하게 그녀의 손을 잡아챘던 산악구조대원 로만 예거의 뇌리엔 라우라의 공포에 질린 표정이 악몽처럼 새겨져있습니다. 라우라의 절친이었던 마라 란다우를 통해 그녀의 죽음이 단순한 자살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로만 예거는 라이텐바허 경감의 도움을 받아 사건의 진상에 다가갑니다.
라우라, 마라와 함께 등반을 즐기던 절친 그룹의 리키, 베른트, 아르민은 라우라의 죽음이 지난 여름 무리한 등반 도중 일어났던 모종의 사건과 연관 있음을 눈치 채지만 그녀를 짝사랑했던 베른트를 제외하곤 애써 자신들의 죄책감을 부정하려고 할 뿐입니다. 하지만 라우라를 죽음으로 몰고 간 ‘실체’는 그룹 모두를 위기로 몰고 갑니다. 그리고 적잖은 희생자가 등장한 후에야 라우라의 죽음의 진실이 세상에 드러납니다.
‘사라진 소녀들’ 이후 두 번째로 만난 안드레아스 빙켈만의 작품입니다. 냉정하게 말하면 ‘사라진 소녀들’은 그리 매력적인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설정은 호기심을 일으켰지만, 캐릭터와 이야기 전개 모두 약간은 무리수를 둔 듯 보였기 때문인데, 그런 아쉬움들이 ‘지옥계곡’에서는 (전부는 아니지만) 꽤 많이 해소됐습니다.
마치 할리우드의 재난 블록버스터와 스릴러를 합쳐놓은 듯 이야기는 긴장감을 놓치지 않은 채 엄청난 속도로 달려갑니다. 악천후로 둘러싸인 지옥계곡을 오르내리는 장면과 후반부의 목숨을 건 추격 장면은 영상화를 염두에 두고 서술한 것처럼 뛰어난 비주얼을 자랑하는데 마치 눈앞에서 직접 목격하듯 리얼하게 묘사되어 저절로 손에 땀을 쥐게 했습니다.
이기심과 집착, 그리고 욕망으로 가득 찬 캐릭터들에 대한 표현 역시 매력적이었습니다. 특히 주요 인물들과 그 가족들 하나하나에게 부여된 불행한 과거사와 피치 못할 사연들은 그들이 겪고 있거나 곧 겪게 될 비극적 운명의 예고편처럼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아마 이런 디테일한 심리 묘사가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 외에도, 연이어 발생하는 참혹한 살인은 비교적 노골적이고 상세하게 그려지는데,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반응만을 노린 꼼수가 아니라 가해자의 증오심과 희생자의 공포심을 극대화하기 위해 적절하게 구사된 묘사들이었습니다.
이런 디테일한 묘사들 덕분에 빙켈만의 전작에서 느꼈던 아쉬움이 적잖이 해소되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비슷한 종류의 아쉬움이 남은 것도 사실입니다. 가장 큰 점은 범인의 캐릭터와 범행 동기입니다. 라우라를 죽음으로 몰고 간 ‘실체’는 초반부터 독자에게 노출됩니다. 현재 이야기와 교차로 편집된 챕터 속에 미지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가 어떻게 라우라의 삶에 끼어들게 됐고, 왜 살인마가 됐는지 조금씩 드러나게 되지만, 그 부분에서 설득력과 개연성을 완벽하게 구현하지 못한 느낌이었습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구체적으로는 언급하기 어렵지만, 마치 그 안에 있던 사람 중 한 명이 범인임이 분명한 밀실살인사건으로 설정해놓곤 나중에 가서 ‘실은 범인은 밖에 있었다’라는 고백을 들은 느낌이랄까요? 또는, 나름 범인과 범행동기에 대해 열심히 단서를 모아가며 쫓아갔더니 애초 그런 노력이 필요 없었을 만큼 뜬금없는 범인과 범행동기를 발견한 느낌이랄까요? 물론 작가가 ‘누가 범인이냐?’보다는 ‘왜?’ 쪽에 더 주력했다는 점은 읽는 내내 이해됐지만, 그러기엔 잘 깔아놓은 설정들이 무척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런 느낌은 ‘사라진 소녀들’에서도 비슷하게 받았었기에 아쉬움이 더 컸습니다.
훌륭한 설정과 뛰어난 심리 묘사, 재미와 긴장을 극대화시킨 이야기 등 페이지 터너로서의 장점이 많은 작품인 것은 분명하지만, 동시에 그런 장점을 가려버린 결정적인 아쉬움이 더 크게 느껴진 작품입니다. 뛰어난 필력을 자랑하는 작가인 만큼 그의 신간이라면 안 읽고는 못 지나갈 것 같고, 이왕이면 다음 작품에서는 독자들의 뒤통수를 칠만한 범인과 범행동기, 즉 ‘누가 범인이냐?’와 ‘왜?’를 함께 만끽할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