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살자들 블루문클럽 Blue Moon Club
유시 아들레르 올센 지음, 김성훈 옮김 / 살림 / 2013년 8월
평점 :
절판


미결사건 전담반 칼 뫼르크와 아사드는 20년도 훌쩍 넘은, 그것도 이미 범인이 자수한 사건을 배당받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오누이가 참혹하게 살해당한 이 사건에 주목합니다. 과거 홀로 자수했던 범인 외에 공범이 있었을 가능성은 물론 현재 덴마크 최상류층인 인물들이 이 사건에 깊이 연관됐음을 간파했기 때문입니다.

과거 기숙학교 시절, ‘51녀 패거리로 불리며 온갖 범죄를 일삼았던 일당에 주목한 칼과 아사드는 그중 홍일점인 키미의 행방을 쫓는데, 그 과정에서 결정적인 물증을 찾아냄으로써 키미와 기숙학교 패거리가 오누이 살해사건 외에 다수의 폭행, 실종, 살인에 연루됐음을 확신합니다. 또한 최근 나머지 패거리가 자취를 감춘 키미를 찾는 데 혈안이 돼있다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한편으론 키미의 행방을 쫓고, 다른 한편으론 기숙학교 패거리의 범행을 입증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던 칼과 아사드는 전혀 생각지 못한 곳에서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집니다.

 

자비를 구하지 않는 여자에 이은 특별수사반 Q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으로, 경찰청 지하의 미결사건 전담반 사무실에 쳐박힌 채 쾌락살인과 폭행을 즐기는 도살자들의 과거 만행을 밝혀내기 위해 분투하는 칼 뫼르크와 아사드 콤비의 끈질긴 탐문과 수사가 600페이지 가까이 펼쳐집니다. 이야기 시작과 동시에 칼과 아사드가 쫓아야 할 악당들이 공개되고, 악당들 사이의 심상치 않은 기류까지 죄다 언급돼서 문득 남은 몇 백 페이지를 무슨 이야기로 채우려고?”라는 의문이 들기도 했는데, 총평하자면 중반 정도까지는 약간의 지루함과 함께 곳곳에서 불필요한 사족들이 눈에 띄었지만, 이후부터는 오히려 속절없이 넘어가는 페이지가 아까울 만큼 이야기가 빠르고 팽팽하게 전개됐습니다.

 

키미를 포함한 기숙학교 패거리는 말하자면 쾌락을 추구하는 묻지마 폭력단입니다. 타인의 고통에서 쾌감을 느끼고, 아무 거리낌 없이 생명을 앗아간 뒤 술과 마약에 찌든 환락의 자축 파티를 여는 인물들입니다. 거기에다 부모까지 잘 만난 덕에 덴마크의 최상류층으로 살아가고 있으니 그들에게 죄의식이나 양심이란 개념은 개나 줘버릴 정도로 하찮은 것에 불과했습니다. 이들의 행각을 묘사하는데 있어 작가는 전혀 주저하지도, 돌려 표현하지도 않습니다. 때론 과하게 느껴지는 장면도 있지만 억지스럽거나 작위적으로 보이진 않습니다.

유일한 여자 멤버였던 키미는 현재 경찰과 패거리 양쪽 모두에게 쫓기는 인물이라 실질적으로 이야기의 중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공포 속에 몰아넣고 쾌감을 느끼고, 더 강한 폭력을 휘두르며 욕정을 느끼곤 했던 젊은 날의 키미는 이제껏 만나본 어떤 악당보다도 매력적인(?) 캐릭터입니다. 마지막까지 양파껍질처럼 하나둘씩 드러나는 그녀의 비밀스런 과거는 혐오의 대상이 되기도, 연민의 대상이 되기도 하면서 독자들의 주목을 독차지합니다.

 

그러다 보니 도살자들에서 몰입감을 최고조로 이끄는 부분은 칼과 아사드 콤비의 활약이 아니라 키미와 패거리의 과거사가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20년 전 이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키미가 패거리와 결별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지, 현재 패거리가 혈안이 되어 키미를 찾는 목적은 무엇인지 등 중반 이후에 속속 밝혀지는 그들의 추악하거나 불행했던 과거사는 숨 돌릴 틈 없기 가쁘게 전개됩니다. 상대적으로 주인공인 칼과 아사드 콤비의 비중은 조연 정도로 많이 축소됐습니다. 물론 진실을 파헤치기 위한 두 사람의 노력에 적잖은 분량이 할애되긴 했지만, 엔딩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활약이 수동적으로만 느껴진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비중도 비중이지만 메인 주인공인 칼 뫼르크에게 집중할 수 없었던 이유는 1편인 자비를 구하지 않는 여자에 등장했던 칼과 2편인 도살자들의 칼이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1편의 칼이 조금은 진지하고 이런저런 내상을 가진 묵직한 캐릭터였다면, ‘도살자들의 칼은 180도 다른, 어딘가 가볍고 수다스러운 캐릭터였습니다. 같은 출판사에서 출간한 시리즈물임에도 번역자가 달라 빚어진 결과일 수도 있겠지만, 이름만 같을 뿐 전혀 다른 인물로 보이는 칼 때문에 읽는 내내 혼란스럽기도 하고 짜증이 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눈에 거슬린 건 도살자들의 칼이 구사하는 천박한 말투와 경박한 행동입니다. 지랄, 개뿔, 미친놈, 빌어먹을, 싸가지 등 1편의 칼이라면 절대 쓰지 않았을 단어들이 수없이 등장하고, 독백의 경우는 더 심해서, ‘이 인간이 내가 무슨 치매라도 걸린 줄 아나?’, ‘저 주둥이를 저대로 두었다간 내가 제명에 못 죽지.’, ‘이러고도 형사라고, 쪽팔린 줄 알아야지.’ 등 캐릭터를 한없이 저급하게 만드는 문장들을 곳곳에서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어느 칼이 원작에 가까운지는 알 방법이 없지만, 적어도 1편에서 총격전 끝에 동료가 죽거나 반신불수가 된 모습을 지켜본 인물이라면, 또 좌천당하듯 경찰청 지하실로 내쫓긴 반골 캐릭터라면 이런 건달 수준의 칼은 아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여러 번 해봤습니다.

 

칼 뫼르크에 대한 아쉬움만 제외하면 도살자들은 별 다섯 개도 너끈한 작품입니다. 스스로 자초하긴 했지만 참혹 그 자체에 가까운 삶을 살아온 키미의 캐릭터 하나만으로도 도살자들600여 페이지를 단숨에 달리게 만드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간혹 이해 안 되는 상황들도 눈에 띄지만 대세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중반까지의 약간의 지루함만 견뎌낸다면 그 뒤를 지배하는 팽팽한 긴장감을 만끽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