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그림자 1 잊힌 책들의 묘지 4부작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정동섭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0살이 된 1945, 책방을 운영하는 아버지 손에 이끌려 잊힌 책들의 묘지라는 신비하고 거대한 책들의 보고를 방문한 다니엘은 운명처럼 바람의 그림자라는 책을 만납니다. 책의 매력에 빠진 다니엘은 작가 훌리안 카락스의 모든 것에 호기심이 일었지만, 서점이나 도서관 어디에서도 그의 다른 작품들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정체불명의 남자가 훌리안의 작품들을 찾아 불태워버린다는 소문을 듣습니다. 더구나 그 남자가 자신에게까지 접근하여 협박하자 다니엘은 책을 잊힌 책들의 묘지에 다시 숨긴 채 베일에 싸인 작가 훌리안의 과거를 캐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얼마 후, 모든 비극의 출발점이 됐던 훌리안의 유년기인 1919년에 대해 알게 됩니다. 죽음조차 갈라놓을 수 없는 사랑이 시작됐고, 향후 수십 년에 걸쳐 진화할 증오와 원한이 싹텄던 그 해의 진실을 접한 다니엘은 더욱 더 훌리안의 삶 속으로 깊이 빠져들고, 아직까지 살아남은 그의 지인들을 만나기 위해 애를 쓰지만 그것이 자신에게 돌이킬 수 없는 위기를 자초하는 일이라는 점은 미처 깨닫지 못합니다.

 

1930년대 스페인 내전을 전후로 한 30여년의 시간과, 지금은 축구와 올림픽의 도시로 화려한 외양을 자랑하지만 한때 살육의 피비린내로 진동했던 바르셀로나를 무대로 펼쳐지는 대서사로,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의 고딕 바르셀로나 콰르텟 시리즈의 첫 편입니다.

역사와 멜로는 물론 미스터리와 복수까지 뒤얽힌 방대한 서사 덕분에 2권의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10권짜리 대하소설을 읽은 느낌입니다. 스페인을 혼란 속에 빠뜨렸던 잔혹한 내전의 상흔, 서로의 등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운명적인 사랑의 주인공들, 유년의 우정과 상처가 증오와 복수로 진화하는 안타까운 사연들, 그리고 한 권의 책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연이은 죽음과 미스터리한 사건 등 이야기는 출판사의 소개글대로 마치 양파껍질처럼, 내부에 여러 개의 미니어처를 품고 있는 러시아 인형처럼펼쳐집니다.

 

크게 보면 훌리안의 삶을 추적하는 현재의 다니엘의 이야기와 비극적인 사랑으로 인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몇 번씩 넘나들어야 했던 훌리안의 과거 이야기로 구성돼있습니다. 하지만 데칼코마니를 연상시킬 정도로 닮은꼴인 다니엘과 훌리안의 삶 때문에 이야기는 과거와 현재로 분리되거나 단절되지 않고 한줄기의 형태로 자연스럽게 읽힙니다. 그 덕분에 1919년부터 1955년에 이르는 짧지 않은 시간적 배경과 무수히 많은 사건들, 그리고 두 사람을 에워싸고 있는 적잖은 조연들에도 불구하고 800여 페이지의 분량을 힘들이지 않고 읽을 수 있습니다.

 

등장인물에 대한 코멘트만으로도 서평을 가득 채울 수 있지만 워낙 특이한 히스토리와 뚜렷한 개성, 굴곡으로 가득 찬 운명들을 지니고 있어서 자칫하면 가볍게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에 자제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독자마다 몰입도가 가장 높았던 캐릭터가 조금씩 다를 것이라는 점인데, 주인공은 주인공대로, 악인은 악인대로, 비련의 캐릭터나 한 많은 캐릭터는 또 그들 나름대로 독자들이 공감할 수밖에 없는 사연들을 잔뜩 등에 업고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악역(처음부터 공개되는 점이니 스포는 아닙니다)을 맡은 푸메로가 그랬는데, 용서할 수 없는 캐릭터이긴 해도 그의 유년기의 상처가 절실하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여러 가지 장점에도 불구하고 평점이 별 네 개에서 그친 이유는 1권 중반까지 읽는 동안 느꼈던 몇 번의 고비(?) 때문입니다. (무지에 의한 오판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스페인 문학만의 특징 때문일 수도 있고,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만의 독특한 문체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조금은 시끌시끌하고, 조금은 현학적이고, 조금은 과장이 심한 문장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더 곤혹스러웠던 것은 여러 가지 비유법이 혼재한 것은 물론 길이까지 길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다보니 한 문장을 두세 번씩 되읽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 어떤 때는 뉘앙스만 파악한 것으로 만족하고 넘어간 경우도 있었습니다. (물론 다니엘의 파트너인 페르민의 해학 넘치는 달변은 예외입니다. 그의 독특한 비유와 재치 넘치는 수다는 돈키호테를 연상시킬 정도로 유쾌한 스페인 식 풍자의 맛을 실컷 느낄 수 있는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복잡한 장문의 난해함이 번역 때문에 생긴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근래 읽은 번역서 가운데 손에 꼽을 정도로 오류를 찾아보기 힘든 작품인데다 원작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번역자가 노력한 흔적이 책 전체에서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1권 중반까지만 작가가 짜놓은 판을 잘 쫓아간다면 그 뒤로는 2권 마지막까지 한 번에 달리고도 남을 만큼 속도감과 긴장감이 배가됩니다.

 

바람의 그림자는 내용만큼이나 시각적인 매력을 지니고 있는데, , 안개, 암울함, 서늘함 등을 주조 삼아 묘사된 바르셀로나의 풍경, 신비한 도서관 잊힌 책들의 묘지’, 악몽을 간직한 폐 저택 안개의 천사등 독특한 공간들은 읽는 것만으로도 눈앞에서 목격하듯 생생하고 사실감 있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 외에도 새벽과 저녁의 미묘한 정경, 세밀화를 보는 듯한 캐릭터의 외양은 물론 만년필, 모자, 시계, 타자기 등 세세한 소품들까지 공들인 묘사가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조만간 천사의 게임천국의 수인을 읽을 예정인데, 시간과 공을 들여 읽어야 할 묵직한 부담감은 있지만,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의 고딕 바르셀로나 콰르텟 시리즈는 그에 상응하는 만족감과 쉽게 잊히지 않을 여운을 남겨줄 것으로 기대합니다. 쉽고 심플한 이야기를 즐기는 독자들에게는 고통스러운 책읽기가 될 수도 있지만, 한번쯤 도전해볼만 한 작품이라고 추천하고 싶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