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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시피 미시시피
톰 프랭클린 지음, 한정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2월
평점 :
절판
25년 전인 1980년대 초, 미시시피 주 샤봇 마을. 흑인소년 사일러스와 백인소년 래리는 흑백의 경계가 그 어느 곳보다 공고했던 미시시피에서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그들만의 우정을 나누곤 했습니다. 하지만 래리가 이웃 소녀 신디 워커 실종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된 후 군에 입대했고, 사일러스가 인근 도시로 이사 가면서 두 사람의 만남은 단절됐습니다. 그리고 40대가 된 두 사람은 25년 만에 샤봇에서 재회합니다.
경찰이 되어 고향에 돌아온 사일러스는 래리가 지난 25년 내내 ‘신디 워커 살인마’로 낙인찍힌 채 인구 500명의 샤봇에서 따돌림을 당해온 걸 알게 되지만 자신도 모르게 래리를 피합니다. 그의 전화를 피했고, 그와의 어릴 적 인연을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던 중 살인사건과 실종사건이 연이어 벌어지자 주민들은 ‘살인마 래리’가 활동을 재개했다고 주장합니다. 상급 수사관들마저 래리를 용의자로 몰아붙이자 사일러스는 진실 찾기에 나서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얼마 후 지금까지 봉인됐던 엄청난 비밀을 알게 됩니다. 문제는 그 비밀 가운데 남들이 알아선 안 되는 자신과 래리만의 은밀한 과거까지 포함돼있다는 점입니다.
이 작품을 읽게 된 동기는 미시시피라는 지명을 반복해놓은 제목 때문이었습니다. 미국의 역사나 문학에 대해 딱히 관심이나 해박한 지식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미시시피라는 고유명사는 왠지 모르게 듣기만 해도 무겁거나 불온한 느낌을 전해주곤 했습니다. 그런 고유명사가 두 번씩 반복됐으니 그 안에 담긴 이야기에 대한 기대감이나 호기심 역시 그만큼 커졌습니다.
스릴러라기보다는 한 편의 대서사극을 읽은 느낌입니다. 흑백의 갈등이 극심한 미시시피를 무대로 두 남자의 25년에 걸친 우정, 사랑, 비밀, 오해 등 굵직한 코드들이 과거와 현재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펼쳐집니다.
흑인이 다수였던 미시시피에서 천식과 말 더듬증 때문에 흑인은 물론 같은 백인에게까지 무시당하면서 ‘우월한 인종’으로서의 지위를 박탈당했고 이후 25년 간 ‘살인마’로 따돌림 당하며 삶의 기반이 통째로 붕괴된 래리의 이야기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미국 남부지방 백인 소년의 성장기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한편 사일러스는 자신이 발견한 비밀과 자신이 봉인해 온 비밀 때문에 고통스러워합니다. 두 가지 비밀 모두 래리와 연관 있는데다 흔적도 없이 지워버리고 싶은 내용들이기 때문입니다. 중후반부에 이르러 두 사람의 25년을 지배해 온 비밀들이 드러나는 순간 미시시피라는 고유명사가 전해주는 무겁거나 불온한 느낌은 절정에 이릅니다.
이런저런 일들 때문에 한 번에 정주행하지 못하고 여러 날에 걸쳐 찔끔찔끔 읽은 탓인지 중반부에 이르기까지 이야기에 제대로 몰입하지 못 했습니다. 하지만 사일러스의 비밀 이야기가 전개되는 지점부터는 책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고, ‘서사를 갖춘 문학적 스릴러’의 맛을 제대로 음미할 수 있었습니다. 딱히 잔혹하거나 선정적인 이야기도 아니고, 오히려 미시시피라는 불온한 공간 속에서 벌어지는 무겁고 끈적끈적한 이야기에 가깝지만, 부조리한 사회와 시대가 휘저어놓은 개인의 삶이라는 주제를 25년에 걸쳐 벌어진 두 차례의 납치 사건들과 잘 결부시킨 작가의 필력 덕분에 끝까지 흥미진진하게 읽어낼 수 있었습니다.
전혀 다른 성향이긴 해도 읽고 난 후의 느낌으로만 치자면 윌리엄 랜데이의 ‘제이컵을 위하여’나 스티븐 킹의 ‘조이랜드’와 비슷하다고 할까요? 그리 빠르거나 복잡하진 않지만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하고 오랫동안 기억될 여운을 남기는 작품이란 뜻입니다.
언제든 시간이 넉넉할 때, 처음부터 끝까지 한 호흡에 다시 한 번 읽어볼 생각입니다. 띄엄띄엄 읽느라 놓친 이 작품의 진가를 제대로 맛보려면 반드시 한 호흡의 정독이 필요해 보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