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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메시스 - 복수의 여신 ㅣ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4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4년 2월
평점 :
크게 세 가지의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오슬로에서 연이어 발생하는 은행 강도사건과 그 와중에 발생한 여직원 스티네 피살 사건, 해리와 만난 밤에 권총으로 자살한 옛 여친 안나 베트센 사건, 그리고 ‘레드브레스트’에서 미결 상태로 끝난 해리의 동료 엘렌 살해사건 등입니다.
스티네 사건의 경우 은행 강도 중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처럼 보였고, 안나 베트센의 경우 누가 봐도 명백한 자살이어서 금세 수사가 종결되어버립니다. 하지만 해리는 그의 새 파트너 베아테 뢴의 도움을 받아 두 사건 모두 우발적이지도, 명백한 자살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특히 안나의 죽음과 관련된 정체불명의 협박성 이메일이 날아들면서 해리는 불길한 예감을 받습니다. 해리와 베아테의 집요한 수사가 시작되지만 사건은 엉뚱한 희생자를 낳으면서 미궁에 빠지게 되고, 도리어 해리를 위험한 지경으로 몰고 갈 따름입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해리는 자신이 누군가가 파놓은 덫에 제대로 걸렸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연히 얻은 프리뷰 기회 덕분에 시리즈 첫 편 ‘박쥐’와 거의 동시에 읽게 됐는데 ‘박쥐’보다 200여 페이지가 더 긴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훨씬 더 빨리 읽힐 정도로 긴장감과 몰입감이 대단했습니다. “진짜 스릴러를 쓰고 싶었다”는 요 네스뵈의 희망과 각오가 그대로 담긴 ‘네메시스’는 ‘스노우맨’에 버금가는 시리즈 대표작으로 꼽아도 손색없는 작품이었습니다.
이야기 골격을 갖추는 데만 1년의 시간을 보냈다는 요 네스뵈의 고백처럼 ‘네메시스’ 속의 세 가지 이야기는 서로 교묘하게 하나의 이야기로 얽혀있는데, 복잡하게 짜여있으면서도 전혀 복잡하게 읽히지 않는, 쉽지만 정교한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를 타이틀로 삼은 데서 알 수 있듯 세 가지 이야기는 모두 ‘복수’를 기반으로 삼고 있습니다. 때로는 닮은꼴의 복수심이 등장하기도 하고, 때로는 상식적으로는 이해 안 되는 복수심이 등장하기도 하고, 때로는 까마득한 시간이 흐른 구원(舊怨)이 동기가 된 복수심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진짜 스릴러’를 쓰고 싶다고 했던 요 네스뵈의 희망과 각오는 어쩌면 대부분의 시리즈들 속에서 좀 과하다 싶게 서술됐던 철학적이거나 역사적이거나 순문학적인 주제의식을 배제하고 오로지 강력한 페이지터너를 만들어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네메시스’에서도 요 네스뵈의 ‘주제의식’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복수를 하는 유일한 생명체는 인간’이며, ‘국가에 의한 공적 복수가 입헌국가의 초석’이라는 아이러니를 강조하면서 요 네스뵈는 상처받거나 모욕받거나 버림받은 자들의 복수를 사실감 있게 묘사합니다. 단지 엔터테인먼트 스릴러의 소재로서의 1차원적인 복수를 묘사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살아있게 만들 수도 있고, 철저히 파괴시킬 수도 있는 근원적인 동기로서의 ‘복수’에 천착함으로써, 재미와 공감을 함께 이끌어냅니다.
누군가와 복수를 매개로 관계 맺어진다는 것은 정말 끔찍한 일입니다. 복수를 마음먹는 사람이 되든 복수의 목표가 되든 마찬가지입니다. 너무나 상투적인 창작물의 소재로 전락한 복수라는 코드가 새삼 이렇게 피부에 와 닿게 느껴진 것은 물론 전적으로 요 네스뵈의 필력 덕분입니다.
다른 작품들도 마찬가지였지만, 특히 ‘네메시스’에서의 요 네스뵈의 캐릭터 플레이는 압권이었습니다. 해리 홀레는 여느 작품보다 해리 홀레다웠고, 그의 새 파트너이자 한 번 본 얼굴은 절대 잊지 않는 특이한 능력의 소유자 베아테 뢴의 캐릭터도 매력적이었습니다. 사건에 연루된 조연 캐릭터들이나 오슬로 경찰청 내의 해리의 적과 동료는 말할 것도 없고 단 한마디의 진술로 그 존재감을 드러내는 평범한 이웃들에 이르기까지 리얼한 캐릭터 묘사를 위해 요 네스뵈가 들인 공의 흔적을 작품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레드브레스트’와 마찬가지로 요 네스뵈는 미결된 사건을 남긴 채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또다시 후속작에 대한 긴 기다림이 시작됐습니다. 조만간 한국을 찾을 예정인 요 네스뵈의 입을 통해 작은 힌트라도 얻기를 바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