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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인간 ㅣ 한스 올라브 랄룸 범죄 스릴러 시리즈 1
한스 올라브 랄룸 지음, 손화수 옮김 / 책에이름 / 2013년 11월
평점 :
절판
노르웨이 오슬로의 크렙스 가 25번지 아파트에서 2차 대전 당시 저항군으로 활약했으며 이후 정부의 고위관료로 재직하기도 했던 하랄 올레센이 시신으로 발견됩니다. 콜비외른 크리스티안센 경감이 수사에 나서지만 현장은 밀실이나 다름없었고 단서와 탐문 역시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합니다. 우연히(?) 사건에 개입하게 된 18살의 장애 천재소녀 파트리시아 덕분에 크리스티안센 경감의 수사는 급물살을 타게 되고, 입주민들에 대한 탐문과 하랄 올레센의 일기장을 조사한 결과 2차 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대 초중반의 노르웨이 저항군의 역사가 사건 자체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음을 깨닫게 됩니다.
북유럽의 뉴 페이스를 만날 때마다 독특한 개성과 문체를 만끽했던 경험 때문인지 어딘가 문학적인 제목과 낯선 작가의 이름에도 불구하고 적잖은 기대감과 호기심으로 만나본 ‘파리인간’입니다. 최근 들어 2차 대전의 상처를 미스터리와 스릴러 속에 녹인 작품들이 심심찮게 출간됐고, 그 가운데 넬레 노이하우스의 ‘깊은 상처’나 요 네스뵈의 ‘레드브레스트’처럼 매력적인 작품들이 준 좋은 느낌들 덕분에 비슷한 시공간적 배경을 지닌 ‘파리인간’이 더 끌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2차 대전의 상흔을 소재로 삼은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파리인간’ 역시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떠밀렸던 힘없고, 나약하고, 불행했던 개인들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춥니다. 모든 등장인물은 시대가 던져준 아픔을 고스란히 맨몸으로 받아들여야했고,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그 상처 때문에 잠 못 이루거나, 여전히 아파하고 있습니다.
‘파리인간’이라는 제목은 그런 맥락에서 지어진 제목입니다. 작가는 파트리시아의 입을 빌어 ‘파리인간’의 정의를 내립니다. “삶의 한 가운데에서 무언가 특히 힘들고 고통스러운 경험을 했던 사람들은 세월이 지나도 그 기억을 떨쳐버리지 못해요. (중략) 즉, 파리인간은 시간이 지나도 과거의 경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그 비슷한 상황에 자신도 모르게 뛰어들게 되거나 스스로 그런 상황을 무의식적으로 재현하는 사람을 말하는 거죠. 쓰레기 더미에 모여드는 파리 떼를 떠올리면 감이 잡힐지도 모르겠군요.”
크리스티안센 경감과 파트리시아의 수사를 통해 새로운 진실들이 드러날 때마다 ‘파리인간’의 정의가 문득문득 떠오르기도 하지만, 작가가 굳이 이런 쉽지 않은 제목을 정한 이유는 사건의 실체와 진범이 밝혀지는 마지막에 순간에 이르러서야 제대로 납득할 수 있게 됩니다.
비슷한 시공간적 배경을 지닌 다른 작품들에 비해 역사가 남긴 상처에 좀더 노골적이고 직접적으로 접근한 덕분에 ‘파리인간’은 그것만의 차별성과 개성을 갖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지니게 되는 아쉬운 점도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가장 큰 아쉬움은 ‘건조함’입니다. 소설보다는 논픽션을 통독한 느낌이랄까요? 크리스티안센 경감과 파트리시아는 인간미가 엿보이는 주인공이라기보다 중립적인 해설자 또는 수사 경과를 설명하는 내레이터 역할에 충실한 캐릭터들입니다. 본문 역시 장문의 수사일지라는 느낌이 강합니다. 전쟁역사학자라는 작가의 이력 때문일 수도 있지만, 딱딱하고 고전적인 ‘사건 중심의 내러티브’를 추구하다 보니 주인공에 대한 응원이나 연민의 감정을 자아내기 쉽지 않습니다.
두 번째는 크리스티안센 경감과 파트리시아의 캐릭터입니다. 나름 저명인사의 피살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수사는 온전히 크리스티안센 경감 홀로 진행합니다. 팀원은 없고, 보고받는 상사는 이름도 없이 짧게만 등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스티안센 경감은 자신만의 독창적인 수사나 추리보다는 장애 천재소녀 파트리시아의 ‘지시’대로 움직이는 수동적인 캐릭터에 가깝습니다. 많은 미스터리와 스릴러에서 볼 수 있는 콤비 플레이와는 사뭇 다른 느낌입니다.
우연치고는 좀 과하다는 느낌을 주는 등장인물들의 인연이라든가 마지막에 드러나는 진범과 사건의 진실 역시 조금은 아쉬운 면이 없지 않지만, 파리인간에 대한 다양한 시선 – 연민, 동정, 애정 등 – 을 묘사하려 했던 작가의 노력을 감안한다면, 충분히 상쇄될 수 있는 정도의 아쉬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책 표지에 보면 ‘한스 올라브 랄룸 범죄 스릴러 시리즈 1’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는데, 두 번째 시리즈가 언제쯤 출간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크리스티안센 경감이 조금은 더 능동적이고 창의적인 수사를 펼치는, 멋진 주인공 캐릭터로 컴백하기를 기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