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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날은 스스로를 상처입힌다 ㅣ 밀리언셀러 클럽 110
마커스 세이키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10년 7월
평점 :
절판
인터넷서점이나 카페를 통해 ‘대단한 데뷔작’이라는 평을 여러 번 접해서 꽤 오랫동안 기대감을 가져왔던 작품입니다. 물론 ‘제2의 데니스 루헤인’이라는 평을 봤을 땐 조금은 과장이 아닐까 여겼던 게 사실인데 결과적으론 그 평을 120%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범죄의 세계에서 벗어나 연인인 캐런과 함께 새 삶을 살고 있는 대니 앞에 7년 전 함께 전당포를 털다가 홀로 체포됐던 에번이 나타납니다. 당시 에번은 대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과욕을 부렸고 끝내 총격으로 사상자를 냈습니다. 대니는 도망쳤지만 에번은 12년 형을 선고받았다가 가석방으로 풀려난 것입니다. 에번이 나타난 후로 대니에게 지옥과도 같은 날들이 시작됩니다. 에번은 대니를 협박하며 제대로 된 한 탕을 벌일 것을 요구합니다. 피도 눈물도 없는 폭력기계로 변한 에번의 요구를 거절했을 경우 어떤 보복이 돌아올지 잘 알게 된 대니는 겨우 얻은 소중한 행복을 지키기 위해 결국 한 탕에 발을 들이게 됩니다. 하지만 대니는 에번의 계획 중 자신이 들은 건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습니다. 예기치 못한 사태들이 벌어지고 무고한 희생자가 발생합니다. 대니는 패닉 상태에 빠지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진 후였습니다. 2주에 걸친 대니의 진정한 지옥은 그때부터 시작됐던 것입니다.
간결하면서도 여러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원제(‘Blade Itself’)에 못잖게 번역 제목 역시 작품의 내용과 작가의 의도를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대니와 에번 모두 스스로를 상처 입히는 ‘예리한 칼날’이면서, 동시에 주변 인물들까지 다치게 만드는 ‘예측할 수 없는 흉기’란 뜻입니다.
마커스 세이키는 데뷔작답지 않은 필력과 촘촘한 구성으로 2주에 걸쳐 벌어지는 숨 막히는 이야기를 한순간도 긴장감을 놓치지 않고 이끌어갑니다. 사건 자체만 놓고 보면 블록버스터급도 아니고 화려한 액션이 난무하지도 않는 소품이지만, 여러 인물들이 겪는 심리적 갈등을 잘 그려냈고 유연한 이야기 전개와 적절한 반전까지 잘 버무린 덕분에 스릴러라기보다는 인간의 본성을 테마로 한 한 편의 고전을 읽은 느낌이었습니다. 특히 대니가 겪는 갈등은 독자들로 하여금 “내가 대니라면?”이란 생각이 저절로 들게 할 정도로 치밀하고 사실감 있게 묘사됩니다. 대니가 맞닥뜨리는 여러 차례의 선택의 기로마다 마치 ‘내가 그 상황에 놓여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은 마커스 세이키가 그만큼 대니와 그의 감정에 대해 오래, 깊이 고민한 덕분일 것입니다.
반전으로 유명한 스릴러나 미스터리에 비하면 이 작품의 반전은 그리 대단하거나 충격적인 편은 아니지만, 적어도 무게감에 있어선 압도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역시 마커스 세이키가 사건보다는 인물, 특히 갈등과 번민에 휩싸인 ‘개인’ 대니에 더 천착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란 생각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출판사의 홍보 글에 ‘대작’, ‘화려하고 웅장한 스케일’ 등의 표현이 들어갔거나 CIA, MI6, 마약카르텔 등 기관의 힘을 빌린 작품을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 그 이유는 그런 작품일수록 정작 중요한 ‘개인’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기관의 힘’과 ‘개인’이 조화를 잘 이룬 명작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작품들을 더러 만나본 경험이 있다 보니 스케일은 상대적으로 작아 보여도 평범한 개인들이 외줄타기에 다름없는 우여곡절을 겪어내는 이야기가 더 매력적으로 느껴진다는 뜻입니다. 그런 점에서 ‘칼날은 스스로를 상처입힌다’는 스케일의 맛은 떨어질지 모르지만, 읽는 동안의 긴장감은 물론이고 읽고 난 후의 기억과 여운을 오랫동안 또렷이 남길 명품으로 보입니다.
이 작품 외에 유일하게 한국에 출간된 ‘대니얼 헤이스 두 번 죽다’를 곧 읽을 계획인데, 마커스 세이키의 다른 작품들도 국내에 좀더 많이 출간되기를 기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