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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인 소녀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6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사와자키 시리즈’ 3편 ‘안녕, 긴 잠이여’를 읽기 전에 전작인 1편과 2편을 다시 읽었습니다. 얼마 전 서평을 올린 1편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와 마찬가지로 2편인 ‘내가 죽인 소녀’ 역시 서평을 쓰지 않던 시절에 읽은 작품이라 다시 한 번 꼼꼼히 읽으면서 3편을 위한 ‘준비운동’을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사건의 진상과 범인을 아는 상태에서의 ‘두 번째 읽기’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미와 긴장감은 여전했습니다. 오히려 처음 읽었을 때 소홀히 넘겼던 문장들이나 상황들을 천천히 되새김질하듯 즐기다 보니 속도전으로 페이지를 넘겼던 ‘첫 번째 읽기’ 때 얼마나 많은 부분을 놓쳤는지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보통은 사건을 의뢰받거나 자발적으로 사건을 맡은 탐정이 진실 혹은 범인을 찾겠다는 명확한 스탠스를 취하기 마련이지만, ‘내가 죽인 소녀’의 경우엔 “휘말렸다.”라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사와자키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11세 소녀의 유괴-살해 사건에 쓸려 들어가게 됩니다.
사와자키는 낯선 괴전화를 받고 마카베의 집을 찾지만 오해받기 딱 좋은 상황에서 마카베의 11살 딸 사야카의 유괴 공범으로 체포됩니다. 혐의는 곧 풀렸지만 다시금 괴전화를 받은 사와자키는 본의 아니게 유괴범의 지시를 받게 된 것은 물론 사야카의 몸값을 배달하는 역할까지 맡게 됩니다. 뒤늦게 오해를 완전히 풀어낸 사와자키에게 “사야카를 찾고 유괴범을 잡아 달라.”는 관계자의 정식 의뢰가 들어옵니다. 관할서인 메지로 경찰서 수사팀과 사사건건 부딪히면서도 의심스러운 인물들을 조사하며 열정적으로 조사를 이어나갔지만 (작품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결국 사와자키에게 들려온 건 사야카가 시신으로 발견됐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분노보다 사와자키를 더 사로잡은 건 “내가 소녀를 죽였다.”라는 죄책감이었습니다.
사건은 해결 기미는커녕 시간이 흐를수록 원점으로 돌아갈 뿐이고,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독자들의 예상을 여지없이 배신하면서 동분서주합니다. 막판 반전과 엔딩에선 어느 정도 예상 가능했던 장면을 마주하고도 뒤통수를 제대로 맞은 기분이 듭니다. 그리고 그제서야 작가가 ‘내가 죽인 소녀’라는 다소 난감한 제목을 붙인 이유를 눈치 챌 수 있습니다. 작품 내용을 복기하며 제목에 내재된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가 죽인 소녀’라는 제목이 ‘교묘하면서도 고도로 위장된, 그래서 이 작품에 딱 맞는 제목’이란 점을 깨달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야기 자체도 재미있지만 역시 이 시리즈의 가장 큰 매력은 사와자키의 캐릭터라는 생각입니다. 사건 관계자를 탐문하거나 용의자를 몰아붙일 때면 얼음장 같은 시크한 태도와 촌철살인 식의 짧고 굵은 한마디로 정신을 번쩍 나게 합니다. 탐정의 개입을 못 마땅히 여기고 그저 권위로 자신들의 체면을 세우려던 메지로 경찰서의 형사들은 사와자키의 쿨하고 빈틈없는 태도에 늘 찌그러지기 바쁩니다. 독자들에게 쾌감을 선사하는 최고의 대목입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결정적인 대목에서 독자들이 기대했던 ‘친절한 설명’이 다소 안이하게 처리된 점입니다.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과정, 즉 사와자키가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한 사소한 단서에서 출발하여 예상 밖의 결과를 얻어내는 일련의 과정이 전부 사와자키의 뇌 속에서 진행된 은밀한 추리의 결과로 처리되다 보니 팩트 폭격의 시원한 맛을 기대했던 독자에겐 좀 ‘생뚱맞은 비약’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사와자키의 설명을 듣다보면 “아, 그랬던 거네.”라며 심정적으로 동조할 수는 있지만, 개인적으론 2% 이상 부족하게 느껴진 아쉬움이 남고 말았습니다.
1, 2편의 복습을 끝내고 이제 따끈따끈한 신간인 ‘안녕, 긴 잠이여’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출판사 소개글을 안 봤기 때문에 개인적인 망상일 가능성이 높지만, ‘안녕, 긴 잠이여’라는 제목이 혹시 레이먼드 챈들러의 ‘필립 말로 시리즈’에서 차용된 건 아닌지 궁금해집니다.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의 말미에 작가 후기 대신 ‘말로라는 사나이’라는 초단편소설을 실을 정도로 하라 료가 레이먼드 챈들러에게 헌사를 바친 점을 감안하면, ‘필립 말로 시리즈’ 가운데 ‘안녕, 내 사랑(Farewell, My Lovely)’과 ’빅 슬립(Big Sleep)‘을 조합해서 제목을 지은 게 아닐까, 하는, 억지스러운 예측을 해보게 됩니다. 실제로 그런 오마주에 가까운 이야기가 전개된다면 읽는 재미가 배가될 수 있겠지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