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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를 구하지 않는 여자 ㅣ 블루문클럽 Blue Moon Club
유시 아들레르 올센 지음, 서지희 옮김 / 살림 / 2012년 10월
평점 :
절판
2007년. 살인사건 전담반의 ‘꼴통’ 칼 뫼르크는 동료들을 잃는 참극을 겪은 후 지하실에 위치한 신설 부서 ‘미결사건 특별수사반’으로 좌천됩니다. 시리아 출신 아사드를 조수로 맞이한 칼 뫼르크는 특별수사반의 첫 미션으로 5년 전 실종된 여성정치인 메레테 륑고르 사건을 선택합니다. 하지만 딱히 해결할 생각도 없고, 그저 자신을 이 지경으로 만든 참극을 원망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그런 그에게 새로운 의욕을 불어넣어준 건 다름 아닌 조수 아사드입니다. 5년 전 사건 발생 당시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던 조그마한 단서에서 출발한 그들은 우여곡절 끝에 메레테를 납치한 범인을 특정하지만, 마지막 순간, 메레테는 물론 자신들의 목숨까지 한 번에 날려버릴 수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과 맞닥뜨리고 맙니다.
지난 해 화제가 됐지만 번번이 독서 리스트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던 작품입니다. 북유럽 스릴러의 독특한 정서를 좋아하는 편이고, 미결사건 전담반이라는 설정이 매력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백하자면 마음에 들지 않는 ‘표지’(가벼운 판타지 또는 게임 소설 같은 느낌?) 때문에 매번 주저하곤 했습니다. 표지와 작품의 ‘질’ 사이엔 아무 상관도 없지만 어쨌든 첫인상이 중요한 건 사람이나 책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올해 시리즈 2편인 ‘도살자들’이 출간된 걸 알곤 늦은 감이 있긴 하지만 순서대로 읽어야겠다는 생각에 첫 페이지를 열게 됐습니다.
꼴통에 퇴물 취급까지 받던 칼 뫼르크와 시리아 출신의 능력자 아사드의 조합은 여느 콤비보다 흥미롭고 독특한 관계를 보여줍니다. 칼 뫼르크는 언뜻 요 네스뵈의 히어로 해리 홀레를 연상시키는 면도 있지만, 그만의 뚜렷한 개성과 상처투성이 이력으로 인해 독자를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습니다. 정식 경찰도 아니고, 칼 뫼르크 밑에서 일하게 된 계기도 불분명한 아사드는 전직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뛰어난 판단력과 날카로운 눈매를 자랑합니다.
메레테의 실종이 메인 사건이라면, 동료들을 죽거나 부상 입히고 칼 뫼르크를 좌천시킨 ‘체크무늬 총격 사건’과 (라이벌인 바크 형사가 수사 중인) ‘자전거 살인사건’이 서브 사건으로 등장합니다. 말하자면 칼 뫼르크는 동시에 3개의 사건에 연루된 채 이야기를 이끄는데, 시리즈 첫 편답게 그의 캐릭터를 다양하고 상세하게 설명해주는 입체적인 설정입니다. 적잖은 분량 속에 3개의 사건이 어지럽지 않게 구성되어 있어서 긴장감을 놓치지 않고 마지막 페이지까지 내달릴 수 있습니다.
이런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자비를 구하지 않는 여자’가 갖고 있는 가장 큰 약점은 메인 사건인 ‘메레테의 실종’이 동기도 허약하고 이야기도 다소 맥이 빠지게 전개된다는 점입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자세한 내용은 언급할 수 없지만, 읽는 내내 “설마 아니겠지?”라고 짐작했던 것이 실제 동기로 밝혀졌는데, 개연성이 없진 않지만 이야기의 무게감을 확 떨어뜨리고 말았습니다. 또한 ‘갇힌 공간’으로 한정된 메레테의 동선 역시 지나치게 단조로워서 심심하게 느껴질 정도였는데, 중간중간 그녀의 과거가 등장하긴 하지만 칼 뫼르크-아사드 콤비의 활약만큼이나 메레테의 역할을 기대했던 터라 아쉬움이 많이 남은 대목입니다.
표지에 대한 불만은 여전하지만, 머지않아 후속편인 ‘도살자들’을 읽게 될 것 같습니다. 모처럼 기대감을 갖게 만든 칼 뫼르크와 아사드의 캐릭터 때문이기도 하고, 촘촘하면서도 무거움과 가벼움을 겸비한, 새로 만난 북유럽 작가의 필력 덕분이기도 합니다. (10년 전쯤 닷새간 머물렀던 덴마크의 풍경이 상세하게 묘사된 건 이야기와는 무관한 특별한 재미를 남겨주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