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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숙청의 문을
구로타케 요 지음, 김은모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3년 8월
평점 :
절판
크리스마스이브의 밤, 여고생 아키가 폭주족의 오토바이에 치어 냉기 가득한 도로변에 참혹하게 쓰러집니다. 그리고 얼마 후... 최악의 악동들이 우글거리는 호간고등학교 3학년 D반에서 졸업식 예행연습이 열리고, 40대 중반의 담임 곤도 아야코가 평소와는 다른 바지정장 차림으로 교실에 들어섭니다. 내향적인 성격 탓에 학생들에게 만만한 장난감 취급을 받던 아야코였지만 그날 그녀가 교탁 위에 올려놓은 것은 날이 잔뜩 선 사냥칼이었습니다. 잠시 후 첫 희생자가 나오고, 아야코는 나머지 학생들을 인질로 24시간 농성에 들어갑니다. 경찰이 출동하지만 아야코의 빈틈없는 계획에 속수무책인 사이 희생자는 늘어만 가고, 아야코의 지시에 따라 시신을 창밖으로 내던지는 학생들의 얼굴은 끔찍한 공포 그 자체로 물들어있습니다.
이 작품이 2001년 한국에 출간된 적 있다는 번역가의 후기를 읽고 그 당시에 충분히 화제작이 됐을 법도 한데 그러지 못했던 이유가 궁금해졌습니다. 사적 복수라는 테마 외에도 학교를 무대로 한 거의 ‘몰살’에 가까운 주인공의 행위가 극단적인 상황 설정과 함께 충격적으로 묘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적 복수라는 테마를 좋아하기 때문에 히가시노 게이고의 ‘방황하는 칼날’이나 야쿠마루 가쿠의 ‘천사의 나이프’ 같은 작품들을 좋아하지만, 이렇게 직접적이고 직설적인 설정은 처음이라 무척 당황스러웠습니다. 더구나 아야코의 행위는 복수를 넘어 ‘판결’의 차원에 이르고 있어서 가치관이 다른 독자라면 초반 50여 페이지를 넘기기가 쉽지 않을 작품입니다. 덧붙이자면, 내용은 전혀 다르지만, 잔혹함에 관한 한 영화 ‘배틀 로얄’이 무색한 정도라고 할까요?
단선적인 구성 같지만, 읽다 보면 롤러코스터를 탄 듯 정신없이 페이지가 넘어갑니다. 경찰에게 완벽하게 포위된 교실 안에서 24시간 동안 학생들을 ‘죽이는 것’ 외에 그녀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의문을 가졌지만, 이후에 전개되는 아야코의 계획은 경찰의 혼을 쏙 빼놓을 정도로 예측 불가능하게 펼쳐집니다. 심리전을 통해 경찰과 언론, 학부모를 서로 적대적인 상태로 만들어놓기도 하고, 언뜻 납득이 안 되는 요구조건을 내걸며 경찰의 진압계획을 무용지물로 만들기도 합니다. 물론 중간중간 ‘처단’이라는 본연의 임무도 잊지 않고 수행합니다.
어떤 지점에서는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아야코의 단죄가 통쾌하게 느껴졌고, 그것이야말로 국가나 사회가 외면해온 피해자의 인권을 지켜주는 마지막 보루처럼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그래선지 이 작품을 놓고 리얼리티를 논하는 것은 제겐 그다지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평범한 40대 여교사가 어떻게 눈 하나 깜짝 않고 칼을 휘둘러 경동맥을 잘라내고, 특등사수 같은 사격술로 정확하게 상대를 쓰러뜨릴 수 있게 됐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이런 픽션이 공감될 정도로 황폐해진 교육 현장과 그보다 더 썩어 빠진 사회에 대해 논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생각입니다.
읽는 사람에 따라 잔혹함과 피비린내 때문에, 또는 너무 직설적인 스토리 때문에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지만, 적어도 곤도 아야코가 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서만큼은 누구나 한번쯤 생각하게 만드는, 그런 의미 있는 사회파 스릴러라는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