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일드 44 뫼비우스 서재
톰 롭 스미스 지음, 박산호 옮김 / 노블마인 / 2012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1953년 스탈린 독재 하의 소련. 국가정보기관 MGB의 기대주 레오는 자신을 시기하고 못마땅하게 여기는 집단의 모함 속에 시골마을로 내쳐집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잔혹하게 살해된 소녀의 시신을 발견하면서 레오의 삶은 요동치기 시작합니다. 입에 흙이 들어간 채 장기가 훼손된 소녀의 시신은 MGB 시절, 자신이 사고로 은폐했던 한 소년의 시신과 똑같았기 때문입니다. 레오는 동일범에 의한 연쇄살인으로 확신하곤 반역죄로 처분될 수도 있는 범죄 수사에 뛰어들기로 결심합니다. 스탈린이 건설한 이상적인 공산주의 사회에서 범죄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이미 국가가 결정한 사안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조차 사상과 충성심을 의심받는 일이기에 레오의 범죄 수사는 그 자체만으로 국가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레오의 수사는 아내와 부모, 그리고 레오를 돕던 사람들을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뜨립니다.

 

모처럼 묵직하고 한시도 긴장감을 놓을 수 없는 대서사를 만났습니다. 1950년대 소련의 암울한 상황과 함께 소년소녀 연쇄살인이라는 최악의 참사가 잘 조합되어 한 편의 고전을 읽은 듯한 느낌이었는데, 정치, 사회, 역사 등 거대한 배경 속에서 우여곡절을 겪게 되는 개인의 비극을 좋아하는 제 취향에 너무나도 잘 맞았던 것 같습니다.

중고서점에서 좀처럼 구하기 쉽지 않았던 탓에 개정판이 나온다는 소식이 너무 반가웠고, 기대 이상의 여운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1930년대 우크라이나를 덮쳤던 대기근(실은 대학살이나 마찬가지였던)1970~90년대에 걸쳐 50여명을 살해한 연쇄살인범이라는 두 가지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톰 롭 스미스가 불과 29살의 나이에 집필한 데뷔작입니다.

 

중요한 부분만 발췌해서 줄거리를 정리했지만, 등장인물도 굉장히 많고 사건 역시 규모나 깊이가 방대해서 제대로 소개하려면 A4용지 2~3장도 부족할 정도입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1950년대 소련의 독재 권력의 힘, 친구는 물론 부부나 가족 간에도 고발이 횡행하던 감시 체계, 먹을 것이 없어 남의 아이라도 잡아먹어야 했던 대기근의 참상, 거기에 44명의 아이가 참혹하게 살해당한 사건이 벌어지고, 덧붙여 블록버스터에 버금가는 긴박한 범인 찾기와 탈주극까지 더해지다 보니 방대한 서사는 당연한 결과일 수밖에 없습니다.

 

냉혹하고 가차 없는 업무방식과 뛰어난 실적으로 국가정보기관 MGB에서 장밋빛 미래를 보장받았던 레오가 한순간에 나락으로 내쳐진 뒤 반역행위나 다름없는 범죄 수사에 나서는 대목부터 갖은 위기와 협박을 감내하며 진실을 찾는 과정은 그 어떤 미스터리보다도 비극성과 긴장감을 발산합니다. 단순한 압박이 아니라 가족이 몰살될 수도 있는 상태에서 과거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레오의 행보는 매번 아슬아슬한 줄타기처럼 느껴져서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곤 합니다.

 

주요 조연으로 등장하는 인물들 역시 면면마다 무게감이 상당한데, 레오를 괴롭히는 MGB 내의 라이벌 바실리는 마지막까지 긴장감을 팽팽하게 만들고, 레오의 아내 라이사는 당시 소련의 감시체계가 가져온 가족의 비극을 생생하게 대변합니다. 레오의 수사를 돕는 민병대장 네스테로브, 반정부인사로 추정되는 라이사의 동료 이반 외에 곳곳에서 롤러코스터의 한 축을 담당한 조연들 덕분에 이야기는 단순한 범인 찾기나 액션 스릴러 이상의 서사를 발휘합니다.

 

다만, 독자에게 다소 생소할 수도 있는 ‘1953년의 모스크바를 설명하기 위해 서론이 필요 이상으로 장황했던 점, 막판에 밝혀진 연쇄살인범의 동기가 기대했던 것과 많이 달랐던 점, 그리고 곳곳에서 발견된 오타는 옥의 티처럼 아쉬웠습니다.

 

검색해보니 톰 롭 스미스가 ‘The Secret Speech’, ‘Agent 6’ 등 레오의 이후 이야기를 시리즈로 출간한 것으로 나오는데, 아직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이유가 궁금해집니다. 시리즈 첫 편의 개정판이 나왔으니 후속작 소식도 조만간 들려오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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