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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제 나를 죽였다
박하와 우주 지음 / 예담 / 2013년 6월
평점 :
품절
‘박하와 우주’라는 특이한 필명, 검찰청 근무 경력이 있는 부부의 공동 집필, 감염자를 살인자로 만드는 치명적인 ‘조디악 바이러스’라는 소재, 그리고 폐쇄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연쇄살인 등 여러 가지 호기심을 자극하는 요소들로 가득 찬 한국 장르물입니다. 늘 일본 미스터리와 영미권 스릴러에 파묻혀 지내다가 이렇게 완성도 높은 한국 장르물을 만나면 그 반가움은 몇 배가 됩니다. 이번엔 우연히 이벤트를 통해 읽게 됐지만, 앞으로는 특이한 이력의 부부 작가 ‘박하와 우주’의 행보에 주목해야 될 것 같습니다.
장준호 박사가 운영하는 범죄피해자 지원센터에 10명의 범죄피해자 또는 유족이 참여합니다. 30일 간의 프로그램을 통해 트라우마를 치유하고 일상에 적응하는 훈련을 할 계획이던 그들은 누군가 악의적으로 퍼뜨린 조디악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맙니다. 감염자를 살인자로 만드는 치명적인 바이러스지만 더 큰 문제는 감염 여부를 파악하는데 한 달이란 시간이 걸린다는 점입니다. 결국 검사 결과가 나올 때가지 지원센터는 폐쇄되고 참가자는 물론 센터 직원들까지 출입이 통제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첫 피살자가 나타나고 조디악 바이러스에 감염된 자의 소행으로 추정되면서 지원센터는 패닉에 빠집니다. 남기호 검사를 비롯하여 수많은 경찰이 투입되지만 희생자는 하나둘씩 늘어가고, 범인은 계속 오리무중인 상태로 결말로 치닫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펼쳐지는 두 번의 반전은 가히 충격적인 엔딩을 보여줍니다.

검찰청에서 근무했던 작가들의 풍부한 경험 덕분이겠지만 작품 속의 캐릭터나 사건들은 뛰어난 사실감을 지니고 있습니다. 연쇄살인범에게 아내를 빼앗긴 전직 기자 유도아를 비롯하여 등장인물들이 겪는 말할 수 없는 트라우마라든가 유족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범인에 대한 증오심’이라는 특별한 연대감은 독자 스스로 그 일원이 된 듯 느낄 정도로 생생하고 선명하게 그려집니다. 인물과 사건 모두 한없이 무겁고 암울한 설정들이지만 굳이 어려운 어휘들을 동원하지 않고도 ‘박하와 우주’는 감정과 팩트 두 가지를 잘 버무려 내놓았습니다.
마지막 두 번의 반전은 최근 읽은 그 어떤 미스터리보다도 강렬하고 충격적으로 전개됩니다. 미스터리를 좋아하면서도 정작 눈썰미는 너무나도 허약한(?) 편이라 소소한 반전조차 예측 못하는 편인데, 혹시라도 이 작품의 마지막 반전까지 눈치 챈 독자가 있다면 아마 ‘이 독자가 대단하다’라는 상을 받고도 남을 만큼 뛰어난 지혜의 소유자일 것입니다. 독자에 따라 이 반전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도 있지만, 저로서는 반전만 놓고 보면 별 다섯 개도 무난하다는 생각입니다.
다만, 일부 작위적인 설정과 중반부쯤 느낄 수 있는 약간의 지루함 탓에 전체적인 평에서는 별 네 개에서 그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속작에 대한 기대감을 충분히 안겨준 작품이었고, ‘박하와 우주’라는 뛰어난 신인들의 묵직한 저력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최근 ‘궁극의 아이’를 읽었고, 조만간 정유정의 신작 ‘28’을 읽을 예정인데, 이렇듯 뛰어난 한국 장르물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은 정말 반갑고 또 반가운 일입니다. ‘박하와 우주’ 역시 머지않은 시간에 새로운 작품으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