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송사냥꾼
존 그리샴 지음, 안종설 옮김 / 문학수첩 / 2012년 3월
평점 :
절판


(엔딩을 비롯하여 여러 스포일러가 담긴 서평입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1990년대의 외국 장르물은 대부분 존 그리샴, 로빈 쿡, 마이클 크라이튼의 작품들입니다. 특히 존 그리샴의 펠리컨 브리프’, ‘의뢰인등 법정 스릴러와 로빈 쿡의 코마’, ‘열병’(Fever), ‘세뇌’(Mindbend) 등 메디컬 스릴러는 호평과 함께 베스트셀러 대열에 올랐는데, 저 역시 그들에게 빠져 스릴러의 세계에서 한참이나 헤매고 다녔었습니다.

하지만, 순문학에 올인하면서 그들의 이후 작품은 거의 접하지 못했고, 한참이 지나 다시 미스터리와 스릴러로 귀환했을 때도 올드보이들의 작품보다는 새로운 작가를 찾는 일에 더 분주했습니다. 자연스레 오래된 작품들에 대해 무관심해질 수밖에 없었고, 여전히 활동 중인 올드보이들의 신작들 역시 왠지 손길이 잘 가지 않았습니다. 물론 당대를 휩쓴 거장들이니만큼 결코 허접한 작품을 세상에 낼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2012년에 발간된 존 그리샴의 소송사냥꾼을 읽게 되기까지 고민의 시간이 필요했던 건 이런 이유들 때문이었습니다.

 

똑똑하고 정의롭지만 힘없고 배경 없는 변호사가 지난한 노력과 멋진 변론을 통해 골리앗 같은 로펌이나 대기업들을 통렬히 망가뜨리는 할리우드식 법정스릴러와 달리 소송사냥꾼은 정반대의 길을 걷습니다. 똑똑하긴 해도 딱히 정의감 같은 건 엿볼 수 없는 주인공이 변호사의 탈을 쓴 사기꾼같은 동료가 일확천금을 위해 시작한 집단소송에 휘말렸다가 모두 함께 쫄딱 망하는 게 메인 스토리입니다.

물론 존 그리샴은 주인공이 거대 제약사를 상대로 영웅적 변론을 벌여 그들을 살짝 물 먹이는 정도의 통쾌함은 전해줍니다. 또한 힘없는 자들에게 관심을 갖고 나름 능력을 발휘하여 그들이 적절한 보상을 받을 수 있게 해주는 에피소드도 많은 분량은 아니지만 기분 좋은 간식처럼 배치되어 있습니다. 막판에는 집단소송으로 인한 엄청난 손해를 어느 정도 커버할 만큼의 소소한 승리도 있습니다.

 

굳이 이렇게 비꼬는 투로 줄거리를 정리한 이유는, 우선, 서론이 80%이고 본론과 결론은 20%에 불과한 전체적인 구성 때문입니다. 또 이야기의 핵심인 집단소송에 참여한 주인공의 어정쩡한 스탠스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앞부분 80% 내내 무모한 집단소송에 참여하기까지의 지루한 서론이 펼쳐지다가 막판에 가서야 적들과 본격적으로 맞붙는 재판 시퀀스가 등장합니다. 더구나 주인공은 탐욕스러운 두 동료의 뒤만 졸졸 따라다닐 뿐 집단소송에 대해 제대로 된 판단이나 예측 한번 하지 못한 채 그들이 친 사고 뒤치다꺼리만 하는 게 전부입니다. 당연히 이야기는 늘어지고 페이지를 아무리 넘겨도 비슷한 이야기만 반복되는데, 더욱 짜증이 났던 건 어느 순간 아군 쪽에서 구린 냄새가 나기 시작하면서 왠지 주인공이 이겨선 안 될 것 같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그 말도 안 되는방향으로 하염없이 흘러갑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주인공은 마지막 반대심문을 통해 거대 제약사를 약간의 곤경에 빠뜨리긴 하지만, 적어도 독자들이 기대한 존 그리샴의 주인공이라면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한판 전쟁을 시작해야 하고 지난한 법정 공방 끝에 속 시원한 승리를 얻어내야만 합니다. 그것이 존 그리샴다운 엔터테인먼트 법정물의 진면목일 텐데 정말 맥이 빠지는 엔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애초 사악하고 비열한 주인공을 앞세워 그의 몰락을 그릴 계획이었다면 나름 의미 있는 작품이 될 수도 있었지만 시작과 끝이 제대로 어긋난 탓에 이도저도 아닌 어정쩡한 작품이 되고 말았다는 생각입니다.

 

과거의 존 그리샴의 작품들을 비교 대상으로 삼는 것 자체가 난센스지만 읽는 내내 한순간도 긴장감을 놓을 수 없었던 펠리컨 브리프의뢰인을 생각하면 소송사냥꾼은 여러 가지로 아쉬움이 많이 남는 작품이었습니다. 기존의 슈퍼히어로 변호사라는 진부한 틀을 깬 기획은 신선했지만 그것이 서론 정도의 역할만 했다면 모를까, ‘무모한 도전과 상처뿐인 영광만 남은 이야기로 끝까지 밀어붙인 것은 요즘의 독자들에게는 크게 어필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