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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극의 아이
장용민 지음 / 엘릭시르 / 201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최근 2~3년 정도만 따지면 정유정의 ‘7년의 밤’ 이후 처음 읽는 한국 장르물입니다. 고백하자면, 한국 장르물에 관한 한 아직까지 편견을 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데, 장안의 화제가 되어 제 귀에까지 그 소식이 들려올 정도가 돼야 “한번 읽어볼까?”, 라는 거만한 고민을 하는 편입니다. 독자들이 늘어나고, 그래서 작가나 출판사도 힘을 얻고, 자연스레 좀더 수준 높은 장르물이 출간되고... 이런 좋은 순환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근거 없는 편견을 걷어내지 못하고 있던 와중에 저의 편견을 부끄럽게 만든 매력적인 작품을 만나게 됐습니다.
배경은 뉴욕이고, 등장인물 중 한국인은 신가야라는 남자뿐입니다. 10년 전, 스무살의 엘리스 앞에 느닷없이 나타났던 또래의 한국인 신가야는 엘리스와 닷새 동안의 불같은 사랑을 나누곤 갑작스레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리고 현재. FBI 요원 사이먼은 주요 인사들의 피살을 예언하는 익명의 편지를 받습니다. 내용도 의심스러웠고 10년 전 소인이 찍힌 편지라 장난으로 여겼던 사이먼은 실제로 부와 권력을 거머쥔 전 세계 주요 인사들이 연이어 살해되자 편지 속 지시대로 엘리스라는 여자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그녀로부터 10년 전에 죽은 한국인 신가야에 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사이먼은 과거 두 사람의 닷새간의 행적 속에 현재의 사건을 풀 수 있는 단서가 숨어있음을 깨닫습니다. 결국 국가안보국까지 나설 정도로 일이 확대되고 사이먼은 우여곡절 끝에 오히려 쫓기는 신세가 되지만, 신가야가 남겨놓은 메시지를 추적하면서 추악한 세력들의 비밀과 진실을 파헤칩니다.
한국 장르물이지만 이야기의 스케일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버금가는 엄청난 규모로 설계됐습니다. 프리메이슨을 능가하는 비밀조직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전 세계적 긴장과 전쟁을 사소한 장난처럼 다루는 에피소드도 담겨있고, 그 일환으로 한국에서의 전쟁을 기획하는 내용도 나옵니다. 또한 ‘궁극의 아이’라는 능력이 느닷없이 신가야에게만 내려진 것이 아니라 기원전 이집트에서부터 길게는 1,000년, 짧게는 10년을 주기로 나타났다는 사실을 상세하고 리얼한 묘사로 설명합니다.
성격은 좀 다르지만, 사건의 스케일, 발상의 기발함, 내공 가득한 필력 등 모든 면에서 ‘궁극의 아이’는 다카노 가즈아키의 ‘제노사이드’를 연상시킵니다. ‘제노사이드’에 등장했던 신인류와 마찬가지로 ‘궁극의 아이’의 신가야도 분명 판타지 캐릭터지만, 꼼꼼하고 치밀하게 직조된 스토리 덕분에, 또 현재 벌어지고 있는 주요 인사들의 피살 미스터리가 워낙 탄탄하고 리얼해서 신가야의 특별한 능력마저도 당연히 현실의 일인 것처럼 받아들이게 됩니다.
신가야-엘리스-미셸(두 사람의 딸), 사이먼-모니카 부부 등 가족의 이야기가 메인 스토리에 잘 녹아든 점도 매력적이었고, 9.11 사건을 중요한 모티브로 사용한 점은 리얼리티를 배가시킨 것은 물론 독자로 하여금 지독할 정도로 감정적인 몰입을 경험하게 만드는 가장 큰 동력이었습니다.
대한민국 스토리 대전 최우수상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야기의 규모로 볼 때 한국에서 영상물로 제작되긴 쉽지 않아 보이지만, 혹시나 할리우드의 관심을 얻게 되어 제작이 된다면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더불어, 장용민의 후속작 소식도 궁금해졌는데, 그 전에 영화로도 제작된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을 먼저 읽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