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타의 매 동서 미스터리 북스 11
대쉴 해미트 지음, 양병탁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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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경 로도스 기사단에 의해 만들어진 보석으로 꾸며진 매 조각상(말타의 매)을 둘러싸고 그것을 수중에 넣으려는 자들과 탐정 샘 스페이드가 벌이는 쫓고 쫓기는 이야기입니다. 청순가련해 보이는 한 여인의 의문투성이 의뢰를 받아들인 스페이드는 그녀 주변에서 일어난 연이은 살인사건 때문에 경찰의 의심까지 받게 됩니다. 하지만 그녀는 스페이드에게 그 어떤 진실도 털어놓지 않은 채 하소연만 할 뿐입니다. 그러던 중, 그녀와 자신을 뒤쫓는 자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스페이드는 말타의 매를 찾는 자들과 차례로 조우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말타의 매가 우연찮게 스페이드의 손에 들어옵니다. 그와 함께 앞서 벌어진 살인사건들의 진상이 드러나면서 예측하지 못한 반전이 벌어집니다.

 

워낙 유명한 고전임에도 올드함에 실망하게 될까봐 이리저리 미뤄놓았다가 뒤늦게 숙제처럼 읽게 된 말타의 매입니다. 예상대로 하드보일드라는 외양에 걸맞게 묵직하면서도 비정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고, 1920년대 샌프란시스코의 축축한 뒷골목을 연상시키는 주요 공간들에 대한 묘사는 마치 영화 ‘Once upon a time in America’대부의 한 장면을 연상시킬 정도로 독특한 색깔을 보여줍니다.

 

스페이드는 훌륭한 두뇌로 사건을 추리하는 탐정이 아니라 직접 발로 뛰고 몸으로 부딪히고, 심지어 범인들과 거래까지 나누는 훨씬 더 인간적인모습을 보여줍니다. 툭하면 자신의 여비서의 몸에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대고, 적당한 수준의 폭력을 휘두를 줄 알고, 결코 당황하는 모습을 내색하지 않는, 말 그대로 무례한 마초이자 멋진 한량그 자체입니다. 이 작품이 영화화됐을 때 당대의 명배우 험프리 보가트가 주연을 맡았다는데 비주얼만으로도 완벽한 싱크에 가까운 캐스팅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런 점들 때문에 이 작품이 찬사를 받고 고전명작의 반열에 오르긴 했지만, 과거의 모든 타이틀을 떼고 냉정한 독자의 눈으로 평가하자면 썩 만족스러운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사건도, 범인도, 그 해결과정이나 마지막에 드러난 진실도 그다지 매력적이지도, 긴장감 넘치지도, 재미있지도 않았습니다. 또 일부 조연을 빼고 스케일을 조금만 축소하면 시추에이션 수사물의 한 회 정도에 충분히 들어갈 만큼 작은 이야기입니다. 더구나 사건만 있고 사람은 잘 안 보이다보니 딱딱한 뒷맛만 남았습니다. 결국 다 읽고 났을 때 기억에 남은 것은 무례한 마초이자 멋진 한량 샘 스페이드뿐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어떤 종류의 느낌이든, 마음속에 남은 게 없었다는 뜻입니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작품 중 유일하게 읽은 안녕 내 사랑의 경우에도 이만큼은 아니었지만 비슷한 뒷맛을 느낀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도 사건이나 인물이 제법 꼬여있어서 긴장감을 놓치지 않았고 스케일이나 엔딩에서 딱히 실망하진 않았던 것 같아서 그의 다른 작품들은 언젠가 읽어볼 계획이 있지만, 어쨌든 영미권의 클래식 하드보일드가 저와는 그리 좋은 인연은 아닌 것 같아 보입니다.

 

사족으로... 제가 읽은 것은 동서미스터리북스 시리즈로 출간된 200822쇄입니다. 초판이 1977년에 나온 것으로 돼있는데 제가 볼 땐 교정 하나 없이 초판 그대로를 재인쇄한 것 같습니다. 오자도 많고, 요즘은 전혀 쓰지 않는 단어도 툭툭 튀어나오고, 무엇보다 “~하오체의 번역을 2008년 판에서도 그대로 썼다는 것은 출판사의 직무유기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작품 자체나 스페이드의 캐릭터를 1920년대의 올드한 구닥다리에 머물게 한 가장 큰 원인이라는 점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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