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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불임 클리닉의 부활
가이도 다케루 지음, 김소연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10월
평점 :
품절
가이도 다케루의 광팬임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뒤늦게 읽게 된 ‘마리아 불임클리닉의 부활’입니다. 가이도 다케루가 창조한 명콤비 다구치&시라토리가 활약하는 시리즈 작품은 아니지만, 불임이라는 소재를 다루고 있어서 관심을 갖게 됐는데, 저출산에 대한 관료 체제의 잘못된 대처, 불임 치료에 관한 국가의 무관심, 그리고 인공수정과 대리모에 관한 도덕적 논란 등 민감하면서도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데이카 대학의 32살의 유망한 산부인과 조교 소네자키 리에는 곧 문을 닫게 될 마리아 불임클리닉에서 마지막 다섯 명의 임산부를 진찰합니다. 세 명은 자연임신, 두 명은 인공수정을 통해 임신을 했는데 모두 제각각 기구한 사연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한편 리에가 속한 데이카 대학에서는 리에의 클리닉 진찰을 못마땅해 하던 차에 그녀가 불법적인 대리모 출산에 손을 대고 있다고 의심합니다. 리에의 파트너이자 멘토인 기요카와는 행정관료나 다름없는 야시키 교수의 명령으로 리에의 불법 행위에 관한 증거를 캐려 하지만 여의치 않습니다. 운명처럼 한날 거의 동시에 모든 임산부가 출산을 하게 되고, 리에는 때를 기다렸다는 듯 파격적인 행보를 통해 야시키 교수는 물론 기요카와까지 패닉 상태에 빠뜨립니다. 그리고 리에의 비밀이 하나씩 드러나면서 기요카와는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리에는 자신들의 영역과 이익을 위해 의료시스템을 붕괴시킨 관료체제와 대학병원에 저항하며 불임 치료에 헌신합니다. 최선을 다한 의료행위에 대해 함부로 사법적 판단을 내리는 썩은 사회 시스템에 대해서도 몸을 사리지 않고 공개적으로 저항합니다. 동시에 리에는 한 여자로서 순탄치 못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삶 속에는 미국에 있는 남편도 있고, ‘적이자 동지이자 연인 같은’ 기요카와도 있습니다. 또 불임치료, 인공수정, 대리모 등 논란이 되는 모든 영역에 그녀 ‘자신’이 개입되어 있기도 합니다. 의사로서도, 한 개인으로서도 행복하고 안정된 삶이라고 할 순 없지만 자신만의 의지와 목표로 치열하게 살아가는 리에의 불꽃같은 열정이 작품 내내 그려집니다.
워낙 민감한 사회적 이슈를 놓고 캐릭터들이 첨예한 갈등을 하는데다 독자들의 궁금증을 야기하는 비밀들도 여러 가지라 쉽게 눈을 떼지 못합니다. 물론 재미보다는 메시지에 더 방점을 둔 작품이다 보니 오락성 강한 메디컬 미스터리 장르인 ‘다구치&시라토리 시리즈’에 비해 긴장감이 덜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이도 다케루만의 매력은 작품 전체를 통해 충분히 만끽할 수 있습니다. 어려운 메디컬 소재를 쉽고 간결하게 묘사하는 능력, 언제나 희망이라는 것을 품은 채 마지막 페이지를 덮게 해주는 배려, 그리고, 정곡을 찌르는 적절한 비유 등이 그것입니다. 불임과 대리모 등 임신을 둘러싼 다양한 논쟁을 픽션을 통해 깊이 각인시킨 점은 ‘다구치&시라토리 시리즈’에 못잖은 힘과 매력을 갖고 있습니다.
다만, 거대한 공룡 같은 시스템에 저항하는 리에가 ‘슈퍼 울트라 초능력자’처럼 묘사된 점은 아쉬웠습니다. 대학교수든 행정관료든 상대를 가리지 않고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정확한 계산으로 상대방을 넉 다운 시키며 기어이 체제 전복적인 결단까지 마다하지 않는 터미네이터 급 여전사인 리에는 의사로서의 능력은 말할 것도 없고 여자로서의 매력, 훌륭한 카운슬러로서의 자질, 심지어 예지력에 이르기까지 사회파 장르물의 주인공이 갖출 수 있는 모든 덕목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이유들 때문에, 가끔은 ‘어라?’할 정도로 멈칫멈칫하게 만드는 챕터들이 등장합니다. 너무 쉽게 국면이 전환되는 부분도 있고, 너무도 비범한 나머지 현실감이 떨어지는 대목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저런 아쉬움이 들긴 했지만 앞서 언급한대로 마지막 장을 덮을 때는 저도 모르게 간절한 희망과 바람을 지니게 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멀지 않은 미래에 리에에게 행복한 날들이 찾아오기를, 또 리에가 꿈꾸는 세상이 허황된 공상이 아니라 조금씩이라도 현실의 모습을 갖춰가기를 응원하게 되는 건 비단 저만의 경험은 아닐 거란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