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939년 명성아파트
무경 지음 / 래빗홀 / 2026년 2월
평점 :
1939년 여름, 경성 변두리의 독신자 아파트에서 기이한 살인사건이 벌어집니다. 경찰은 입주민들은 물론 때마침 영화촬영을 위해 아파트에 머물던 감독과 배우까지 철저히 심문하지만 좀처럼 단서를 잡지 못합니다. 그러던 중 또 한 명의 입주민이 목숨을 잃고, 조만간 아파트를 허물 거라는 말까지 나오자 남은 입주민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12살의 나이에 식모살이를 하는 입분은 자신이 모시는 마님 최연자, 일명 가야마 렌코가 살인사건의 진상을 밝혀내지 않을까, 기대하지만 사태는 점점 악화될 따름입니다.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미스터리 ‘마담 흑조는 곤란한 이야기를 청한다’와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인간의 타락을 지켜보는 악마가 등장하는 판타지 호러 미스터리 ‘부디 당신이 무사히 타락하기를’에 이어 세 번째로 만난 무경의 작품입니다. 그의 첫 출간작인 ‘1929년 은일당 사건 기록’을 아직 읽진 못했지만, 제겐 ‘관심 목록’ 상단에 올려놓고 늘 신작 소식을 고대하는 개성 강한 한국 장르물 작가 중 한 명입니다.
3인칭 시점이긴 하지만 이 작품의 실질적 화자는 일본 경찰에게 부모를 잃고 12살 나이에 식모살이를 전전하는 소녀 입분입니다. 일본 저택에서 쫓겨난 입분은 ‘최연자’와 ‘가야마 렌코’라는 두 개의 이름을 가진 정체불명의 마님 덕분에 명성아파트에 머물며 생계를 이어가는데, 그곳에서 일어난 두 개의 살인사건에 휘말리며 본의 아니게 큰 고초를 치르게 됩니다. 그리고 프롤로그에서부터 입분의 평범치 않은 재능을 눈치 챈 독자들의 기대대로 막판에 이르러 최연자와 함께 사건 해결은 물론 불꽃놀이처럼 연이어 터지는 반전을 선사합니다.
첫 페이지의 명성아파트 평면도에서부터 본격 미스터리의 향기가 슬그머니 풍기지만, 첫 살인사건이 벌어질 때까진 ‘불쌍한 소녀 입분의 고행기’가 잔잔하게 펼쳐집니다. 동시에 뭘 하는 사람인지, 왜 이 독신자 아파트에 사는 건지 온통 비밀투성이인 최연자에 대한 궁금증이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그러다가 첫 살인사건이 터지면서 이야기는 급속히 빨라지고, 독자는 작가가 슬쩍슬쩍 뿌려놓는 떡밥들이 과연 무슨 의미를 지닌 건지 의아해하며 허겁지겁 쫓아가게 됩니다.
12살 소녀의 눈높이로 전개되는 이야기인데다 사건도 그리 복잡해 보이지 않아서 중반을 좀 넘어선 대목까지만 해도 살짝 느슨하게 읽힌 게 사실인데, 이 작품의 백미는 바로 그 지점부터 엔딩까지 쉴 새 없이 몰아치는 반전에 있습니다. 범인의 정체는 그다지 뜻밖이라고 할 순 없지만 그 이후 입분과 최연자가 터뜨리는 연이은 반전은 짜릿한 롤러코스터처럼 속도와 낙차가 대단해서 중반까지의 느슨함을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았습니다. 또 위화감을 자극했던 사소한 단서와 복선들이 깔끔하게 회수되는 과정에선 본격 미스터리의 참맛도 만끽할 수 있었고, 일제강점기와 근현대사를 미스터리의 주 무대로 삼는 무경의 특기도 다시 한 번 진하게 맛볼 수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론 2024년에 첫 편이 출간된 ‘마담 흑조 천연주’의 두 번째 이야기를 내내 고대하고 있는데, 내년(2027년)엔 꼭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추천의 말’에 실린 송시우의 추천사를 인용하며 서평을 마무리하겠습니다.
“무경은 일제강점기 조선을 추리소설의 형식으로 그럴듯하게 재현해내는 독보적인 작가다. 납작한 반일 감정이나 애국주의로 일변하지 않고, 저 시대 우리가 살았더라면 정말 저랬을 것 같다는 공감을 하게끔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