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책
안나 마촐라 지음, 유소영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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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괴적인 전염병이 휩쓸고 간 1659년 이탈리아 로마. 젊은 수사판사 스테파노 브라키는 교황청과 로마총독의 밀명을 받아 일련의 기이한 죽음을 조사합니다. 사후에도 부패하지 않고 혈색을 유지하는 시신들이 여기저기서 발견됐기 때문입니다. 해부학자 마르첼로와 함께 사건을 조사하던 스테파노는 탐문 끝에 아쿠아라는 이름을 가진 무색무취의 독약이 조직적으로 유통된 정황을 포착합니다. 제조자는 물론 판매자와 구매자까지 모두 여자인 것으로 드러나자 스테파노는 충격에 빠지는데, 더욱 놀라운 건 살해된 남자들이 아내 또는 가족에게 모두 지독한 폭력을 휘둘러왔다는 사실입니다. 



“로마에서는 어떤 경우 남편은 아내를 죽여도 된다. 순간적인 격정에서 비롯된 행위라면 죄가 되지 않는다. 여자의 생명에는 그 정도의 가치밖에 없다.” (p27)


이 작품은 17세기 이탈리아에 실제로 존재했던 ‘아쿠아 토파나’라는 무색무취의 독약과 그것을 이용하여 폭력적인 남자들을 살해했던 여자들의 이야기를 원전으로 삼은 팩션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150명에 달하는 조직은 로마를 무대로 화장수 겸 성수로 위장한 독약을 판매하여 600명 이상의 사망자를 낳게 했고, 1659년 지로니마 스파나를 비롯한 주범들이 사형되면서 와해됐습니다. 작가는 역사에 의해 잔혹한 살인집단이자 악녀로 기록된 인물들을 픽션을 통해 부활시키며 ‘남자에게 살해당하지 않기 위해 독약을 이용해야만 했던 여자들의 이야기’를 서스펜스 스릴러로 만들어냈습니다.


‘여자는 치댈수록 맛있어지는 반죽이다’라는 속담이 횡행했던 당시 로마 남자들의 폭력은 야만 그 자체입니다. 르네상스와 인본주의로 상징되는 17세기였지만, 여자란 곧 함부로 망가뜨려도 되는 소유물이란 의식이 당연한 상식처럼 통용됐고, 권력자와 종교지도자들마저 이 상식을 신의 뜻이라 주장하던 시대였습니다. 

양어머니로부터 독약 제조법과 그 비밀을 담은 책 ‘리브로 디 세그레티’를 물려받아 로마에서의 독살극을 지휘하는 지롤라마 역시 지독한 폭력의 희생자였고, 그녀와 함께 은밀하게 조직을 이끄는 여자들도 대부분 모두 지워지지 않을 폭력의 상처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있어 독약은 단순한 사적 복수를 위한 범죄도구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최후의 수단입니다. 죽임을 당하지 않기 위해 먼저 죽여야만 하는 지옥 같은 현실에서의 유일한 해법이었던 것입니다.


작가는 지롤라마를 추적하는 젊은 수사판사 스테파노 브라키에게 난이도 높은 딜레마를 부여함으로써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강한 출세욕에도 불구하고 고문이나 폭력적인 행위를 혐오하는 그는 진상에 다가가면 갈수록 ‘어떤 경우에도 살인은 범죄’라는 법의 원칙과 ‘독약 외에는 목숨을 부지할 길이 없던 여자들의 기구한 사연’ 속에서 갈등을 거듭합니다. 또한 똑같은 독약을 쓰고도 전혀 다른 처우를 받는 귀족과 서민 사이의 차별에 분노하기도 합니다. 교황청과 로마총독의 압박이 나날이 심해지는 가운데 그는 법이든 신이든 과연 지롤라마를 심판할 수 있을까, 라는 해답 없는 딜레마에 빠지고 맙니다.


기이한 시신에 대한 조사로 시작된 미스터리 스릴러는 중반부를 넘어서면서 지롤라마와 스테파노 사이의 팽팽한 심리전을 앞세우며 서스펜스 서사로 장르를 탈바꿈합니다. 특히 출세욕과 부당한 압박과 정의감 사이에서 고민하는 스테파노가 지롤라마와 조직원들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겪는 심리적 롤러코스터가 압권인데, 장르물로서의 긴장감이나 반전은 미미하지만 앞서 쌓여온 비극적인 서사들이 힘을 발하면서 마지막 장까지 손을 놓을 수 없게 만듭니다.


2022년에 한국에 소개된 ‘넬라의 비밀 약방’(사라 페너)은 여자들에게 ‘남자를 죽이는 독’을 파는 18세기 런던의 약제사 넬라의 이야기인데, 장르나 서사 모두 이 작품과는 전혀 다르지만 지롤라마와 스테파노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은 독자라면 한번쯤 관심을 가져볼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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