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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거짓말이 중요하다
애슐리 엘스턴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4월
평점 :
8년 전, 절도 현장에서 체포될 뻔했던 루카 마리노는 스미스라는 정체불명의 남자 덕분에 위기를 벗어났지만, 그 대가로 그의 지시를 받아 위험천만한 미션을 수행하는 스파이가 됐습니다. 매번 다른 이름과 신분을 제공받은 루카는 절도, 사기, 몰카 등 온갖 불법적인 미션에 투입돼왔고, 현재는 루이지애나의 사업가 라이언을 표적 삼아 활동하며 에비 포터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순조롭게 라이언의 연인이 되어 스미스가 원하는 정보를 캐던 루카는 어느 날 큰 충격에 빠집니다. 자신과 비슷한 외모의 여자가 나타나선 스스로를 루카 마리노라고 소개한 것은 물론 ‘진짜 루카 마리노’의 과거까지 완벽하게 숙지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혼란에 빠졌던 루카는 이내 스미스가 어떤 목적을 갖고 그녀를 자신에게 보냈음을 깨닫습니다.

애슐리 엘스턴은 한국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지만 첫 작품부터 후속작을 기대하게 만들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첫 번째 거짓말이 중요하다’는 도메스틱, 서스펜스, 스파이 등 다채로운 스릴러 서사가 혼재된 작품으로, 오랫동안 유능한 스파이로 암약해온 루카 마리노가 오직 사서함을 이용한 우편물과 기계음으로 변조된 통화만으로 지시를 내리는 미스터리한 보스 스미스와 정면 대결하는 이야기를 그립니다.
유능함을 인정받긴 했지만 루카는 스미스가 결코 자신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절감하곤 했습니다. 특히 훈남 사업가 라이언을 상대로 한 미션을 수행하면서 루카는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됨에도 불구하고 수시로 위화감에 사로잡힙니다. 스미스의 지시 내용이나 미션 진행 속도가 평소와는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중 외모는 물론 자신의 과거까지 복제한 여자가 나타나고 뜻밖의 사건까지 벌어지자 루카는 이번 미션에 다른 의도가 깔려 있음을 확신합니다.
루카가 갖은 위기를 겪으며 스미스와의 대결을 도모하는 현재 시점의 이야기와, 과거 루카가 수행했던 몇몇 미션의 전모를 그린 이야기가 병행됩니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스미스의 스파이가 되어 8년 동안 완벽한 거짓말과 가짜 신분으로 불법적인 삶을 살아왔지만 루카는 매번 자신의 표적에게 동정심을 품거나 감정을 이입하는 등 ‘뼛속까지 사악한 스파이’가 되진 못했습니다. 스미스의 ‘넘버원 스파이’로 인정받기 위해 분투한 적도 있지만 어느 샌가 스미스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하는 자신을 발견한 루카는 미션을 수행할 때마다 조금씩 반격을 위한 ‘무기들’을 준비해오곤 했습니다. 그리고 스미스의 진짜 의도를 파악한 직후부터 교묘하고 은밀하게 그를 무너뜨릴 계획을 진행시킵니다.
뛰어난 스파이이자 거짓말쟁이로서의 루카의 카리스마와 매력도 대단하지만, 엄청난 정보력과 네트워크를 지닌 정체불명의 보스 스미스 역시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는 캐릭터입니다. 수하의 유능한 스파이들을 이용하여 이익을 추구할 뿐인 단순한 악당 보스가 아니라 오락과 쾌감을 위해 수하들을 상대로 야비하고 잔혹한 계략을 일삼는 그의 행태는 그 어떤 악당 캐릭터와도 비교할 수 없는 서늘한 냉기를 내뿜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루카가 뛰어난 스파이라 해도 언제 어디서든 상대방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희롱하다가 죽일 수 있는 스미스는 난공불락처럼 보이는데, 이런 긴장감 덕분에 마지막 장까지 조금도 안심할 수 없는 짜릿함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하필 이 작품을 읽는 동안 여러 가지 일이 생기는 바람에 한 번에 완주하지 못하고 서너 차례에 걸쳐 나눠 읽었는데, 그래선지 재미있게 읽고도 이 작품의 진가를 제대로 맛보지 못했다는 생각입니다. ‘첫 번째 거짓말이 중요하다’는 결과를 다 알고 읽어도 재미가 반감되지 않을 작품이라 바쁜 일이 마무리되는대로 꼭 한 번 찬찬히 재독할 계획인데, 어쩌면 띄엄띄엄 읽은 첫 번보다 더 강렬한 인상을 받을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