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의 흔들림 - 영혼을 담은 붓글씨로 마음을 전달하는 필경사
미우라 시온 지음, 임희선 옮김 / 하빌리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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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즈키 지카라는 오랜 역사와 진심 어린 서비스로 사랑받는 미카즈키 호텔에 근무하는 호텔리어입니다. 단골 고객의 연회를 준비하던 쓰즈키는 초대장 봉투에 붓글씨로 주소를 적어주는 서예가 도다를 찾아갔다가 경박하고 괴짜 같은 그의 언행에 깜짝 놀랍니다. 서예가라기보다는 꽃미남 바람둥이 혹은 거리낌 없이 막말을 내뱉는 무례한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우발적으로 맡게 된 편지 대필 작업 덕분에 조금씩 서로를 알아가기 시작합니다. 쓰즈키는 도다의 수려한 붓놀림과 생생한 감정이 느껴지는 글씨에 반하고, 도다는 모두에게 호감을 사는 쓰즈키의 타고난 공감력과 이해심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우정은 도다의 갑작스럽고도 일방적인 통보 때문에 파열될 위기에 처합니다.

 


먹의 흔들림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배를 엮다의 작가 미우라 시온의 작품이란 점, 또 하나는 소재가 고풍스럽고 예스러운 정서가 깃든 서예라는 점 때문입니다. ‘배를 엮다는 이제 더는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사전을 제작하는 편집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인상적인 작품인데, 연필과 볼펜조차 구시대의 유물처럼 여겨지는 요즘 서예 역시 사전과 마찬가지로 아날로그 향기가 진하게 풍기는 소재라서, 또 서예가이자 필경사(손글씨로 글을 적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가 주인공으로 등장해서 남다른 기대감을 품었습니다.

 

간략하게 요약하면, 살아온 이력이나 직업, 성격, 타인과의 소통방식까지 정반대인 두 남자 쓰즈키와 도다가 서예를 통해 소중한 인연을 맺는 이야기입니다. 쓰즈키가 반듯한 모범생 같은 남자라면, 도다는 어딘가 삐딱한데다 서예가와는 거리가 먼 괴짜 같은 남자입니다. 당연히 첫 만남부터 충돌과 몰이해가 거듭되고 마치 만담 커플이 서로 딴 소리만 주고받는 듯한 웃지 못 할 장면들이 이어집니다. 그러던 두 사람은 우연히 맡게 된 편지 대필 때문에 뜻밖의 협력을 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자신과는 다른 상대방의 진면목을 발견합니다.

 

제가 알기로 필경사는 한국에선 거의 찾아보기 힘든 직업입니다. 연회 초대장의 주소를 붓글씨로 대필하는 일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더구나 (요즘도 서예학원이 존재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서예 자체가 무척 희귀하거나 사치스러운 취미로 여겨진 지 오래된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미우라 시온은 먹과 벼루가 발산하는 은은한 향기라든가 화선지 위를 힘차게 또는 부드럽게 오르내리는 붓의 움직임, 그리고 그 움직임이 자아낸 갖가지 형태의 글씨의 향연 등 서예의 고풍스러운 매력을 필경사 도다를 통해 생생하게 그려냄으로써 거의 문외한이나 다름없는 독자마저 그 아름다운 세계에 푹 빠지게 만듭니다.

 

다만 꽤 야박한 평점을 준 이유는 쓰즈키와 도다가 소중한 인연을 맺어가는 스토리 자체가 너무 밋밋하고 감흥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에게 접점을 만들어준 편지 대필은 다소 뜬금없는 설정 같았고, 그 대필 편지의 내용도 그다지 흥미롭지 않았습니다. 또한 쓰즈키가 괴짜에 가까운 필경사 도다의 페이스에 말려들며 호감을 갖게 되는 에피소드들 역시 자연스럽지 못했는데, 그러다 보니 쓰즈키의 말과 행동이 매번 ?”라는 의문을 자아내곤 했습니다. 다 읽고도 기승전결을 갖춘 이야기라기보다는 도다와의 만남을 기록한 쓰즈키의 일기장처럼 느껴진 건 이런 이유들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서예의 매력과 품격을 그린 장면들은 정말 아름답고 황홀했지만, 정작 두 주인공의 이야기는 그다지 눈길을 끌지도 못했고 음미할 만한 여운도 남기지 못했습니다.

 

찾는 사람도 별로 없는 사전을 제작하는 편집부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그린 배를 엮다처럼 먹의 흔들림에서도 등장인물들이 품는 뭉클함과 뿌듯함, 그리고 충만한 아날로그 감성을 만끽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터라 아쉬움이 더 크게 느껴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미우라 시온이 그린 서예를 통한 치유의 서사에 만족한 독자가 훨씬 더 많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이 작품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다른 분들의 서평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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