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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되살리는 남자 ㅣ 스토리콜렉터 120
데이비드 발다치 지음, 김지선 옮김 / 북로드 / 2025년 3월
평점 :
플로리다주 연방법원 판사 줄리아 커먼스와 그녀의 경호원 앨런 드레이먼트가 판사의 자택에서 살해된 채 발견됩니다. 새 파트너 프레더리카 화이트와 함께 플로리다로 날아간 에이머스 데커는 사건 현장을 보자마자 위화감에 사로잡힙니다. 현지 요원은 판사의 판결에 불만을 품은 자의 보복살인으로 추정했지만, 한 사람은 총으로 깔끔하게, 한 사람은 칼로 무참하게 살해된 현장을 본 데커는 ‘별개의 살인사건’일 가능성을 떠올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경찰 시절 첫 파트너였던 메리의 자살, 데커의 뇌에 이상 변화가 감지됐다는 연구소의 통보문, 느닷없이 배정된 새 파트너, 그리고 최근 들어 자꾸 떠오르는 죽은 아내와 딸의 추억 등 데커는 극도로 불안하고 심란한 상태에서 좀처럼 사건의 실마리를 찾아내지 못해 곤경에 빠집니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 에이머스 데커의 일곱 번째 이야기인 ‘기억을 되살리는 남자’는 여느 전작들보다 이 시리즈의 팬들에게 호기심과 기대감, 안타까움과 연민을 동시에 선사합니다. 오랜 파트너 알렉스 재미슨이 뉴욕으로 떠난 뒤 데커에게 반강제로 배정된 새 파트너 화이트는 첫 등장부터 강렬한 인상을 풍기는 것은 물론 데커와 비슷한 가슴 아픈 상처를 지닌데다 수차례 충돌과 화해를 거듭하며 데커의 진지한 파트너로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줘서 단숨에 시리즈 팬들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한편 매 작품마다 아내 캐시와 딸 몰리에 대한 그리움을 드러냈던 데커가 메리의 자살로 인해 더더욱 깊은 심연으로 빠져들며 우울증 이상의 위태로운 모습을 보이는 장면이라든가 뇌에 이상 변화가 감지됐다는 통보 때문에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휩싸이는 장면은 그에게 주어진 잔혹한 운명을 다시 한 번 절절히 느끼게 만들어서 독자의 마음을 안타깝고 스산하게 만듭니다.
데커는 화이트의 반론에도 불구하고 ‘다른 범인에 의해 벌어진 별개의 살인사건’으로 여기고 수사를 진행합니다. 탐문을 거듭할수록 판사와 경호원의 숨겨진 사연들이 밝혀지고 두 사람의 살해 동기가 전혀 다르다는 점이 드러나면서 데커의 추론은 힘을 얻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초능력에 가까운 데커의 과잉기억증후군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 불안하고 심란한 상태에서 좀처럼 수사에 집중하지 못하기 때문인데, 바로 이 지점에서 새 파트너 화이트가 큰 힘을 발휘합니다. 자신을 믿지 못하는 듯한 데커에게 정면으로 대들기도 하고, 언성을 높여가며 의견을 개진하기도 하던 화이트지만 그의 과거 속 비극과 현재의 고통을 알게 된 뒤로는 자신의 가족사와 속내까지 터놓으며 치유와 위로의 역할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미스터리의 구도만 보면 592페이지라는 분량은 다소 과해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기억을 되살리는 남자’는 데커의 무간지옥 같은 고뇌, 화이트의 현실적인 고민, 그리고 두 사람 사이의 롤러코스터 같은 교감이 미스터리 못잖게 중요한 서사라서 그 부분에 꽤 많은 페이지가 할애된 작품입니다. 다른 작품 같으면 과도한 분량에 다소 불만을 품었겠지만, ‘기억을 되살리는 남자’는 사건보다 두 사람의 개인사가 더 강렬한 인상을 풍겨서 조금도 길거나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사실 데커와 화이트의 수사는 판사와 경호원 주변 인물들을 거듭 탐문하는 게 전부입니다. 물론 탐문 중에 얻어낸 정보를 통해 새 인물들이 조사 대상으로 떠오르기도 하고, 오랜 과거 속 사건과 인물까지 소환되면서 사건의 외연은 초반보다 엄청나게 확장됩니다. 막판까지 반전이 거듭되는 가운데 화이트의 도움으로 초능력을 제대로 발휘하게 된 데커는 판사와 경호원의 죽음의 진상을 극적으로 밝히는 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독자의 궁금증을 자극했던 몇 가지 의문 - 왜 데커에게 새 파트너가 갑자기 배정됐나? 왜 플로리다에서 벌어진 사건에서 현지 요원들이 아닌 데커와 화이트가 수사의 주체가 됐나? - 이 마지막 장에서 풀리면서 짜릿한 쾌감과 함께 앞으로 이어질 후속작에서의 두 사람의 활약에 큰 기대감을 갖게 만듭니다.
검색해보니 ‘기억을 되살리는 남자’(2022) 이후 에이머스 데커의 여덟 번째 이야기는 출간되지 않았습니다. 그 사이 ‘6시 20분의 남자 시리즈’가 3편까지 나왔던데, 데이비드 발다치가 언제쯤 데커-화이트 콤비의 두 번째 이야기를 선사할지 그저 궁금하고 기다려질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