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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 체면
도진기 지음 / 황금가지 / 2025년 4월
평점 :
2020년 ‘세 개의 잔’(‘진구 시리즈’ 5편) 이후 5년 만에 읽은 도진기의 작품입니다.(단편집으로만 치면 2017년 ‘악마의 증명’ 이후 8년 만입니다) 2022년 ‘복수 법률 사무소 1~3’이 출간됐지만 1,500페이지에 가까운 어마어마한 분량에 짓눌린 데다 기대하던 ‘고진 시리즈’와 ‘진구 시리즈’가 아니라서 패스했고, 2023년에 출간된 ‘애니’는 중편 분량에 불과해서 장바구니에 담기를 주저했습니다.(다행히 ‘애니’는 이번 중단편집에 수록됐습니다)
신작 소식이 너무 반갑기도 했지만 역시 ‘고진 시리즈’와 ‘진구 시리즈’가 아니라서 살짝 아쉬웠던 게 사실인데, 그래도 오랜만에 도진기의 다양한 스펙트럼의 단편들을 만날 수 있어서 나름 흥미로운 책읽기가 됐습니다.

법정을 무대로 한 미스터리 두 편(‘법의 체면’, ‘완전범죄’)을 포함하여 가상현실과 물체 전송기술을 다룬 SF물과 복수 스릴러 등 여러 장르의 맛을 한꺼번에 즐길 수 있는 뷔페 같은 단편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부장판사와 변호사를 지낸 도진기의 이력이 빛났던 두 편의 법정물이 가장 눈길을 끌었는데, ‘법의 체면’이 진실보다 체면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법부의 경직성과 권위의식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면, ‘완전범죄’는 말 그대로 그 누구도 알아챌 수 없는 완벽한 살인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뜻밖의 반전과 함께 풀어낸 작품입니다. (‘법의 체면’에는 단편집 ‘악마의 증명’에서 두 편의 수록작에 등장했던 전직 검사이자 변호사 호연정이 등장해서 무척 반가웠습니다)
8년 전 출간된 단편집 ‘악마의 증명’에서 도진기는 “추리와 오컬트 혹은 호러가 결합된 작품에 늘 매료되곤 한다.”라면서 수록작 중 거의 절반을 예상치 못한 장르로 채웠었는데, 이번 ‘법의 체면’을 보면 그의 관심이 SF로까지 확장됐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이 갈망하던 인생을 꿈에서 마음껏 누릴 수 있게 만들어주는 프로그램이 개발되지만 생각지 못한 오류가 발생하면서 벌어지는 미래형 비극 ‘애니’, 양자컴퓨터를 통해 물체를 다른 공간으로 전송하는 기술을 소재로 한 과학 서스펜스 ‘컨트롤 엑스’ 등 두 편의 SF물은 소재 자체도 흥미롭지만 디스토피아의 암울한 분위기가 돋보였던 작품입니다.
그 외에 사회파 복수 스릴러 ‘당신의 천국’은 인생의 최고 단맛과 쓴맛을 모두 맛본 여자가 이끌어낸 아이러니한 엔딩이 인상적이었고, 한 남자의 찌질하면서도 파멸적인 사랑 이야기를 그린 ‘행복한 남자’는 허무한 결말 탓에 좀더 세고 독한 설정이 아쉽게 느껴진 작품이었습니다.
작가의 관심영역과 스펙트럼이 넓고 다양해진다는 건 환영해야 할 일이지만, 개인적으론 도진기 미스터리의 진수가 가장 빛나는 ‘고진 시리즈’와 ‘진구 시리즈’의 공백이 너무 오래 이어지는 것 같아 서운하고 아쉬울 뿐입니다. 다음에 도진기의 신작 소식이 들려온다면 꼭 두 시리즈 중 한 편이기를 진심으로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