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바나의 우리 사람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294
그레이엄 그린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4월
평점 :
혁명 직전의 혼란에 빠진 1958년 쿠바의 수도 아바나. 진공청소기 판매상인 영국인 제임스 워몰드는 팔리지 않는 신제품과 제멋대로인 17살 딸 밀리 때문에 하루하루가 버거울 뿐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영국인으로부터 비밀정보부의 ‘우리 사람’(Our Man), 즉 요원으로 일 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워몰드는 처음엔 정색하며 거절했지만, 적잖은 활동비에 혹한 나머지 대승적인(?) 결정을 내립니다. 문제는 아무런 자질도 없는 그가 전문가 요원들을 섭외하는 것은 물론 수시로 비밀정보부에 보고서를 내야 한다는 점. 결국 그는 가짜 요원들을 만들고 신문기사로 짜깁기 한 그럴듯한 보고서로 비밀정보부를 속이기로 작심합니다.

1958년에 출간된 ‘아바나의 우리 사람’은 혁명 전야의 쿠바를 배경으로 영국 비밀정보부의 첩보활동을 그린 스파이물이지만 “비밀정보부를 놀리려는 목적으로 쓴 겁니다.”라는 작가의 말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신랄한 풍자와 비아냥으로 채워진 이색적인 스파이물입니다. 작가 자신이 비밀정보부에서 활동할 당시 겪은 충격적인 경험, 즉 해외 요원들이 보너스를 더 받기 위해 유령 요원을 만들어내고 가짜 보고서를 제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 이 작품을 구상하게 된 계기였다고 하는데, 작가는 거기에 덧붙여 자기 망상과 무능함에 사로잡힌 영국 비밀정보부에 대한 조롱까지 담아냄으로써 웃지 못할 코미디를 창조한 것입니다.
영국 비밀정보부는 “애국심 충만한 영국인이니까.”라는, 일반인도 이해하기 힘든 난센스 같은 이유로 워몰드를 ‘우리 사람’으로 발탁합니다. 이어 그가 컨트리클럽 명부에서 골라낸 그럴싸한 이름의 가짜 전문가들에 대해선 표면적인 확인 절차만 진행했고, 그가 제출한 각종 보고서는 아무런 의심이나 제대로 된 분석도 없이 기정사실로 받아들입니다.
궁핍한 생활에서 벗어나고 딸의 풍족한 미래를 위해 ‘우리 사람’을 수락한 워몰드는 결코 야비하거나 사악한 인물이 아닙니다. 결과적으론 국가에 대한 배신이고 배임과 횡령을 일삼는 범죄행위이긴 하지만 그는 언제라도 처벌받을 각오를 하고 있습니다. 다만 도덕적으로 모호한 캐릭터 때문에 독자는 그를 응원해도 되는 건지 잠시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동시에 영국 비밀정보부를 조롱하기 위해 작가가 주인공을 도구적으로 사용했다는 느낌도 피할 수 없었는데, 그래선지 개인적으론 이 작품에서 가장 아쉬웠던 게 워몰드의 애매모호한 캐릭터였습니다.
워몰드의 가짜 스파이 행각은 비밀정보부에서 비서를 파견하면서 위기에 봉착합니다. 더구나 절반쯤 장난삼아 그린 스케치 한 장과 거짓 보고서 한 부를 비밀정보부가 ‘엄청난 뭔가’로 평가하고 ‘진실’로 받아들인 탓에 워몰드의 상황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릅니다.
이야기 속 당사자들은 심각한 패닉 상태에 빠지지만 그 광경을 지켜보는 독자들은 실소와 한숨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황당한 코미디가 어떤 파국을 맞이하게 될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워몰드의 가짜 스파이 행각이 발각되긴 할지, 발각된다면 비밀정보부는 어떤 대응을 할지, 만약 발각되지 않는다고 해도 워몰드에게 해피엔딩이 찾아오게 될지 등 독자의 궁금증을 자극하는 요소들이 마지막까지 완만하면서도 긴장감 넘치게 전개됩니다.
스파이물에 녹아든 영국식 블랙코미디와 풍자는 수시로 웃음을 자아낼 만큼 흥미로웠지만 쉽게 적응하기 힘들었던 ‘뻣뻣하거나 다소 불친절한 영국식 문장’ 때문에 완전히 몰입해서 읽어내진 못한 게 사실입니다. 다소 어렵게 읽었던 존 르 카레의 스파이물 몇 편과 비슷한 인상이었다고 할까요? 그래선지 작가가 직접 각본가로 참여했다는 동명의 영화로 이 작품의 묘미를 제대로 맛보고 싶은 욕심이 들기도 했는데, 워낙 오래 전에 제작된 영화라 OTT든 다른 경로에서든 찾아낼 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쉽고 빠르게 페이지가 넘어가는 작품은 아니지만 설정이나 인물 모두 독특해서 스파이물 취향이 아닌 독자라도 “비밀정보부를 놀리려는 목적으로 쓴” 이 이색적인 스파이물에 관심을 가져봐도 괜찮다는 생각입니다. 호기심이 동한 독자라면 다른 분들의 서평도 참고해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