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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 데이즈
루스 웨어 지음, 서나연 옮김 / 하빌리스 / 2025년 2월
평점 :
자신타 크로스(이하 잭)와 남편 게이브는 기업의 의뢰를 받아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모의 공격을 실행함으로써 보안 취약점을 찾아내는 펜 테스터(Penetration-tester)입니다. 잭의 완벽한 현장침투 능력과 게이브의 고도의 사이버공격 능력 덕분에 두 사람이 이끄는 보안회사는 순항 중입니다. 그런데 한 기업의 테스트를 마친 어느 날, 게이브가 목이 잘린 채 살해되고 현장침투를 마치고 돌아온 잭이 그 참상을 목격합니다. 패닉 상태에 빠졌던 잭을 더욱 놀라게 한 건 경찰이 자신을 용의자로 여긴다는 점. 더구나 자신도 모르는 거액의 생명보험 계약이 체결됐다는 메일이 때마침 도착하자 잭은 스스로 진실을 찾아내기 위해 경찰서를 빠져나갑니다. 런던경찰청의 지명수배가 떨어진 가운데 잭은 목숨을 건 필사의 여정을 시작합니다.

‘헤더브레 저택의 유령’을 비롯하여 여러 작품이 한국에 출간된 루스 웨어지만 설정이나 분위기가 제 취향이 아닌 것 같아 한 편도 읽지 않았는데, “남편을 죽인 진범을 찾기 위해 도망자가 된 아내의 8일”이라는 홍보 카피에 눈길이 끌려 ‘제로 데이즈’를 통해 처음 만나게 됐습니다.
잭과 게이브에게 부여된 펜 테스터라는 독특한 직업 덕분에 독자는 두 가지 중요한 서사를 예측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디지털, 컴퓨터, 스마트폰, 보안, 해킹 등 이른바 테크노 스릴러가 펼쳐질 거라는 점이고, 또 하나는 뛰어난 현장침투 능력을 가진 잭이 결정적인 순간 액션 스릴러의 진수를 보여줄 거라는 점입니다.
안 그래도 이야기가 시작되자마자 게이브가 살해당하고 잭이 ‘도망자’라는 위험천만한 여정을 선택한 덕분에 독자는 초반부터 빠르고 긴박한 흐름을 만끽할 수 있는데, 거기에다 흥미진진한 테크노 액션 스릴러까지 예감이 되니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못잖은 이야기를 기대하게 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도망자 스릴러의 고전인 해리슨 포드 주연의 영화 ‘도망자’와 마찬가지로 8일에 걸친 잭의 도망자 여정은 몸과 마음이 피폐해질 정도로 고난의 연속입니다. 경찰에게 쫓기다가 입은 상처는 날이 갈수록 악화되고, 진범 찾기는 그야말로 눈 감고 코끼리 다리를 더듬는 식의 막연함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런 잭에게 정보와 피난처를 제공하는 건 게이브의 평생 절친인 콜과 언니 헬레나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도움 속에 잭은 자신의 현장침투 능력을 발휘하여 조금씩 진상에 다가갑니다.
마지막 장까지 한 호흡에 읽어낼 수 있을 정도로 엔터테인먼트 스릴러의 미덕을 갖추긴 했지만 개인적으론 아쉬움이 좀더 남은 작품입니다. 우선 큰 틀 자체가 너무 익숙하게 설정돼있습니다. 도망자+테크노+액션 스릴러의 조합은 거의 예상한대로 전개됐고, 반전과 진범의 정체 역시 그다지 놀랍지 않습니다. 테크노 스릴러의 소재도 요즘 독자에겐 다소 식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평범했고, 그것이 게이브의 죽음을 초래하는 과정은 거의 공식에 가깝게 설정돼있습니다.
루스 웨어가 제 취향과는 거리가 먼 작가라고 여긴 더 큰 이유는 잭의 심리묘사에 할애된 지나친 분량 때문입니다. 특히 게이브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과 사랑을 여러 차례 반복적으로, 그것도 지나치게 길게 묘사하다 보니 중반쯤부턴 그런 대목이 나오면 눈대중으로 페이지를 넘기곤 했는데, 물론 그 애정이 위험천만한 도망자 신세를 선택한 잭의 가장 큰 동력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론 과도한 강조가 오히려 역효과를 냈다는 생각입니다.
요약하면... 새로움과 신선함이 부족하긴 하지만 도망자 스릴러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입니다. 읽다가 잭의 심리묘사 대목에서 느슨함이나 지루함이 느껴지면 과감하게 건너뛰어도 무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