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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좀 드리겠습니다
리베카 머카이 지음, 조은아 옮김 / 황금가지 / 2025년 2월
평점 :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영화학 교수이자 유명 팟캐스터인 보디 케인은 무려 23년 만에 모교인 명문 기숙학교 그랜비를 방문합니다. 2주에 걸쳐 영화학과 팟캐스트에 관한 강의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모교로 향하는 보디의 머릿속엔 23년 전인 1995년, 학교 수영장에서 피살체로 발견된 룸메이트 탈리아 생각으로 가득합니다. 당시 흑인 트레이너 오마르가 범인으로 체포됐지만 아직도 “범인은 따로 있다!”라는 주장들이 인터넷에서 심심찮게 제기되기 때문입니다. 보디 역시 다른 사람을 의심해왔지만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팟캐스트 강의 수강생 중 한 명이 탈리아 사건을 다루고 싶다고 밝히면서, 그랜비에서의 보디의 2주는 진범을 찾고 오마르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한 험난한 여정으로 돌변합니다.

‘질문 좀 드리겠습니다’에 관한 해외 언론의 추천사와 출판사 소개글을 간략하게 편집하면 “페미니즘적인 분노를 동력 삼아 그루밍 성범죄, 미투 운동, 교내 성폭력의 본질을 다룬 여성혐오 범죄미스터리”입니다. 실제로 주인공 보디가 진실을 추적하는 사건은 ‘젊고 부유하고 어여쁜 소녀의 죽음’이며, 메인 사건 외에도 갖가지 여성혐오 범죄가 등장하는가 하면, 심지어 보디의 남편 제롬이 미투 가해자로 지목되는 에피소드가 전개되기도 합니다. 나이와 지위에 관계없이 여성을 혐오하고 성적으로 공격하는 남성이 수두룩하게 등장하고, 그 수법 역시 비열하고 음험해서 읽는 내내 공분을 자아내곤 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노골적이고 직설적인 방식으로 여성혐오라는 주제를 드러내진 않습니다. 오히려 미스터리, 인종갈등, 계급의 문제 등 다양한 서사들을 적절히 버무림으로써 ‘강조하지 않고도 더 강렬한 방식’으로 작가의 의도를 독자에게 전달합니다.
초반부터 보디는 ‘당신’이라는 자를 탈리아 살해범으로 지목하며 조사에 나섭니다. 그는 1995년 당시 오페라를 가르치던 30대 교사였고, 보디는 탈리아와 부적절한 관계였던 그가 어떤 이유로든 살인을 저질렀다고 믿어왔습니다. 탈리아의 연인이었던 학생을 의심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30대 교사를 향한 보디의 의심은 거의 확신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23년이란 시간이 흐른 터라 새로운 증거를 찾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제 40대에 접어든 동급생들의 기억을 소환하는 것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당시 경찰의 수사가 터무니없이 허술했고, 학교는 사건을 은폐하기에 급급했으며, 트레이너가 범인으로 몰린 건 단지 흑인이란 이유 때문이란 걸 잘 알지만, 그 모든 걸 입증하기엔 보디는 너무나도 무력합니다.
탈리아를 살해한 진범을 찾는 미스터리와 노골적으로 자행되는 여성혐오에 대한 비판이 이야기의 주축이긴 하지만, ‘질문 좀 드리겠습니다’는 그랜비에서 질풍노도와도 같은 시기를 거쳤던 23년 전 10대들의 이야기에도 적잖은 분량을 할애합니다. 우정, 애증, 시기, 혐오, 비밀과 거짓말로 뒤섞인 그들의 관계는 지금의 눈으로 보면 야만의 시대라고 불러도 무방한 1995년이라는 배경 때문에 더욱 날것 같은 불안함과 위태로움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탈리아의 죽음은 끔찍한 비극이긴 해도 소녀 살인사건치곤 그 수법이 잔인하지도, 선정적이지도 않았지만, 그녀와 또래들 사이에 흐르던 시한폭탄 같은 분위기 때문에 그 어떤 살인사건보다 더욱 참혹하고 서늘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정통 미스터리와 범죄스릴러를 기대했거나 돌직구 같은 젠더 크라임 스토리를 기대한 독자라면 23년 전 진실을 찾아가는 보디의 여정이 다소 느리고 답답하게 읽힐 수도 있습니다. 사건 외적인 이야기도 많고, 보디의 내적 갈등이나 심리묘사도 적지 않은데다 그것들을 표현한 문장은 꼭꼭 씹어 읽어야 그 맛을 음미할 수 있을 만큼 은유적 혹은 상징적이기 때문입니다. 또 (번역의 문제인지는 몰라도) 두세 번 되읽어야 할 문장도 제법 됐고, 과거와 현재가 혼재된 구성이라든지 헷갈릴 정도로 많은 등장인물 수도 한몫 거든 게 사실입니다. 재미있게 읽었지만 별 1개를 뺀 건 이런 이유들 때문입니다.
이 작품 전에 출간된 ‘The Great Believers’(2018)가 뉴욕 타임스가 선정한 ‘21세기 100대 도서’에 선정된 걸 보면 리베카 머카이라는 이름을 꼭 기억해놓아야 할 것 같습니다. ‘질문 좀 드리겠습니다’가 좋은 성과를 내서 조만간 ‘The Great Believers’의 한국 출간 소식이 들려오기를 기대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