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작은 무법자
크리스 휘타커 지음, 김해온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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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7살 소녀 시시 래들리를 죽이고 살인죄로 수감됐던 빈센트 킹이 30년 만에 출소한다는 소식에 해안도시 케이프 헤이븐의 분위기는 뒤숭숭해집니다. 하지만 당시 15살 동갑으로 빈센트와 단짝이었던 경찰서장 워크는 그의 출소와 귀향을 누구보다 반기고 기뻐합니다. 다만 죽은 시시의 언니이자 자신과 빈센트의 소꿉친구이기도 했던 스타 래들리를 생각하면 마음이 착잡해집니다. 스타는 어린 남매 더치스와 로빈을 두고도 술과 약에 중독돼 툭하면 응급실에 실려 가곤 했고, 워크는 그런 스타 가족을 각별하게 지켜보며 도움을 줘왔기 때문입니다. 빈센트의 귀향이 스타 가족에게 미칠 영향 때문에 고심하던 워크는 별 풍파 없이 시간이 흐르자 안심하지만 어느 날 빈센트로부터 충격적인 전화를 받습니다. 자신이 스타를 죽였다는 것입니다.

 


나의 작은 무법자는 작은 해안도시에서 벌어진 끔찍한 사건이 30년에 걸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망가뜨리고 피폐하게 만들었는지를 보여주는 비극적인 서사이자, 30년 만에 다시 벌어진 살인사건의 진상을 조사하는 범죄소설이며,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시작되어 아직도 진행 중인 비극에 휘말린 13살 소녀 더치스의 복수극과 성장기를 그린 작품입니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건 과거에 매달린 채 고통스런 30년을 살아온 경찰서장 워크와 스스로 무법자임을 자처하며 자신 앞에 놓인 지독한 현실에 저항하는 13살 소녀 더치스입니다.

30년 전의 사건은 워크에게 가혹한 운명을 강요했습니다. 단짝 빈센트는 살인죄로 성인 교도소에 수감됐고, 소꿉친구였던 스타는 동생을 잃은 뒤 엄마마저 자살한 여파로 삶이 망가져버렸습니다.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죄책감에 사로잡혔던 워크는 오랜 시간 동안 가해자인 빈센트와 피해자인 스타 모두에게 진심을 다해왔지만, 30년 만에 출소한 빈센트가 스타를 살해하고 자수하자 말할 수 없는 충격에 빠집니다.

더치스는 불과 13살이란 나이에 세상의 막장과 마주한 소녀입니다. 술과 약에 찌든 엄마 대신 5살 동생 로빈을 지켜야 하는데다, 비열한 방식으로 자신과 동생을 공격하는 자들에게 맞서는 게 일상이다 보니 결코 평범한 13살이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더치스는 스스로를 무법자라 자칭하며 거친 욕설과 폭력으로 무장한 채 힘든 나날들을 견뎌내지만 엄마 스타가 무참하게 살해당한 뒤엔 속절없이 무너지고 맙니다. 이후 외할아버지 핼의 농장에 머무는 동안 더치스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진정한 무법자로 성장합니다.

 

이 작품의 원제는 본문에 종종 등장하는 끝은 또 다른 시작이다.”라는 대사를 의미하는 ‘We Begin at the End’지만, 개인적으론 13살 소녀 더치스를 강조한 나의 작은 무법자라는 번역 제목이 훨씬 더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30년의 망령에 집착한 채 살인사건 미스터리를 담당한 워크의 이야기보다 스스로 무법자가 되기 위해 분투하는 더치스의 복수극과 성장기가 더 강렬하고 매력적으로 읽혔기 때문입니다. “난 무법자 더치스 데이 래들리다. 네놈은 겁쟁이 놈팡이고, 내가 네놈 목을 깔끔하게 날려주마.”라는 무자비한 대사와 함께 자신을 공격하는 자라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덤벼드는 더치스는 말 그대로 야생마 같은 날것의 힘을 폭발시키곤 합니다. 또한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벌어진 비극의 무게에 짓눌려 평범한 13살로 살아갈 길을 빼앗긴 더치스가 세상과 맞서 싸우는 대목에선 동정이나 연민 이상의 애틋함마저 느낄 수 있는데, 그래선지 마지막 반전과 함께 더치스에게 찾아온 가혹한 운명을 읽을 땐 가슴 한쪽이 시려올 정도였습니다.

 

등장인물도 많고 그 관계도 복잡하고 운명적으로 설정된 데다 사건의 비극성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참담하고, 각 인물들이 속에 품은 감정들 역시 하나같이 지독하거나 극단적이어서 결코 쉽고 편하게 책장을 넘길 수 있는 작품이 아닙니다. 이야기의 흐름 역시 완만하고 묵직한 편인데, 속독에 익숙하거나 성격 급한 독자라면 단선적인 구도에도 불구하고 느리게 진행되는 미스터리와 집요하고도 때론 넘쳐 보이는 풍경 및 심리 묘사 때문에 중반부쯤 살짝 느슨함과 지루함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어려움들은 진실이 밝혀지는 막판에 이르러 수십 배는 거뜬히 넘을 만큼 충분히 보상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작가가 왜 그토록 복잡하고 느리고 완만한 서사를 쌓아왔는지를 제대로 이해하게 됩니다.

 

단순한 범죄스릴러나 미스터리 이상의 문학성 짙은 장르물을 찾는 독자라면 한국에 처음 소개된 크리스 휘타커의 나의 작은 무법자를 꼭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13살 소녀 더치스가 진정한 무법자로 성장하는 지난하고 고통스런 과정을 다른 독자들도 공유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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