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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 크라임 ㅣ 이판사판
덴도 아라타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5년 2월
평점 :
한 중년남성이 알몸의 사체로 발견됩니다. 그의 몸에선 “눈에는 눈”이라는 범인의 메시지가 발견되고, 이내 그가 3년 전 집단 성폭행 사건의 범인 중 한 명의 아버지로 밝혀지면서 경찰은 피해 여대생과 그녀의 가족을 주시합니다. 당시 경찰 고위직과 정치권 인사가 압력을 행사한 끝에 검찰은 기소를 포기했고 범인들은 유유히 법망을 벗어났지만 피해자와 그 가족은 사죄 한 번 받지 못한 채 지옥과도 같은 삶을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관할서 베테랑 형사 구라오카는 본청 수사1과의 루키 시바 린리와 파트너가 되어 수사에 나서지만, 왜 3년이나 지나 복수에 나선 건지, 또 성폭행범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를 살해한 이유는 무엇인지 알 수 없어 답답할 따름입니다.

“그것은 여자라는 성을 무의식중에 낮춰보기 때문이겠죠. 성범죄라고 해도, 겨우 그것쯤이야,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죠.” (p283)
‘젠더 크라임’이라는 제목과 표지 속 ‘Stop killing women’이라는 메시지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 작품은 갖가지 여성 대상 범죄의 실상을 폭로하고 그런 범죄를 양산하고 비호하는 사회적 토양을 정면으로 비판합니다. 3년 전 성범죄에 대한 복수로 보이는 살인사건을 추적하는 미스터리로 출발하지만 딥 페이크, 아동 포르노, 가정폭력, 데이트폭력, 성희롱, 강간 등 여성을 먹잇감이나 장난감으로 여기는 추악한 범죄들이 메인 사건 못잖은 비중으로 다뤄지고, “성에 관한 편향된 생각이나 무자각적인 차별의식, 예로부터 내려온 왜곡된 성문화”가 모든 여성 상대 범죄의 근원이라는 점을 돌직구처럼 강조하고 있어서 단순한 사회파 미스터리 이상의 울림을 품고 있습니다.
경찰은 성범죄를 수사하는 주체이기도 하지만, 남성 중심으로 돌아가는 조직이다 보니 의도적이든 아니든 성차별이 만연한 곳이기도 합니다. 주인공인 베테랑 형사 구라오카는 그런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인데, 성범죄에 관한 한 누구보다 단호한 입장을 취하면서도 정작 그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가부장적이고 성차별적 언행을 저지른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합니다. 그런 그가 ‘요즘 젊은이’ 같으면서도 ‘바른생활 남자’처럼 올바른 말만 하는 파트너 시바와 함께 수사를 진행하면서 젠더와 차별의 문제에 관해 크고 작은 깨달음을 얻는 모습은 단순히 교과서적인 계몽과는 차원이 다른, 의미 있는 경종으로 읽힙니다.
이 작품에서 또 한 가지 중요한 주제로 다뤄지는 건 ‘속죄’입니다. 애당초 죄를 짓는 것 자체가 잘못이지만 어떤 이유로든 죄를 지었다면 벌을 받고 속죄하는 것이 피해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임을 덴도 아라타는 거듭 강조합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망치고 영혼을 죽이는 것이나 다름없는 잔인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속죄를 거부했던 가해자들과 그 가족은 중년남성이 살해된 직후 뒤늦게 공포에 사로잡히면서 속죄에 관해 서로 다른 입장을 보이기 시작하고, 그렇게 촉발된 가해자들 간의 갈등은 또 다른 살인사건의 단초가 됩니다. 그 대목부터 덴도 아라타는 다소 노골적으로 주제의식을 드러내는데, 살짝 작위적인 느낌이 들긴 해도 거부감이 들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젠더 크라임’이라는 제목은 한편으론 호기심을 자아내면서도, 또 한편으론 혹시나 이 작품이 젠더 문제에 관한 계몽 소설이 아닐까, 라는 의구심을 품게 만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덴도 아라타의 작품을 읽어본 독자라면 그가 결코 둘 중 어느 쪽으로도 치우지지 않을 거란 걸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젠더 크라임’은 미스터리에도 충실했고, 젠더와 차별의 문제에도 진심으로 접근한 작품입니다. 그래선지 젠더의 문제에 관한 한 옛날보다 퇴보한 듯한 이즈음의 한국에서 이 작품이 널리 읽히면 좋겠다는 생각을 여러 번 해봤습니다. 북스피어 삼송 김사장님의 편집후기의 마지막 문장을 인용하며 서평을 마치겠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동의 없이 타인의 몸을 만지지 말고, 성적인 말로 상대를 불편하게 하지 말자. 그리고, 죽이지 말자.”
사족으로...
원래는 이 작품과 맥이 닿아있는 ‘영원의 아이’(1999)를 먼저 읽으려 했는데, 삼송 김사장님께서는 ‘젠더 크라임’과 자신의 편집후기를 먼저 읽은 뒤 ‘영원의 아이’를 읽어보기를 권하셨습니다. 무거운 마음으로 읽어야 하는 작품이라 연이어 읽긴 부담스럽지만, 조만간 ‘일본 문단 최대의 사건’이라고까지 불렸던 ‘영원의 아이’를 꼭 읽어볼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