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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선 - 뱃님 오시는 날
요시무라 아키라 지음, 송영경 옮김 / 북로드 / 2025년 1월
평점 :
불과 17가구가 모여 사는 에도 시대의 작은 어촌마을엔 독특한 풍습이 있습니다. 겨울이 되어 바다가 사나워지면 뱃님이 오시기를 기원하는 의식이 열리는 것입니다. 낮에는 바닷가에 모여 합장을 하고 제물을 바치는가 하면, 밤이면 모래사장에 소금가마를 설치하고 불을 피웁니다. 언뜻 마을 앞바다를 지나는 배들의 무사 항해를 기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 의식은 배를 암초 지대로 유인하여 난파되게끔 만드는 기만술입니다. 척박한 환경과 지독한 가난 속에 늘 생존의 위협에 시달리던 마을사람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런 식으로 난파된 배에 실려 있는 양식과 재물을 통해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해왔고, 이제 9살이 된 이사쿠는 말로만 듣던 뱃님이 오시는 모습을 처음으로 목격하게 됩니다.

에도 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라면 장르를 불문하고 좋아하지만, ‘파선’은 생존을 위해 난파를 유도하는 한 어촌마을의 기괴한 풍습이란 설정 그 자체에 눈길이 끌려 출간과 동시에 장바구니에 넣은 작품입니다. 인터넷서점에선 미스터리로 분류해놓았지만 실은 호러 또는 공포물에 더 가까우며, ‘일본 기록문학의 대가’ 요시무라 아키라의 작품답게 절반쯤은 논픽션의 향기까지 맛볼 수 있습니다.
섬의 끝단에 자리한데다 이웃마을을 오가는 데만 며칠이 걸릴 정도로 고립된 이사쿠의 마을은 대대로 생존의 위협에 시달려왔습니다. 부실한 땅에서 이뤄지는 농사는 잡곡 몇 가지가 전부일 뿐이고 주된 식량인 해산물 역시 해마다 들쑥날쑥인, 그야말로 살아남기엔 최악의 환경인 것입니다. 언젠지 알 수 없지만 암초투성이인 앞바다가 최초로 뱃님을 선물한 이래로 마을은 바람과 파도가 거세지는 겨울만 되면 ‘뱃님 오시는 날’을 기원하며 배의 난파를, 누군가의 죽음을, 그래서 먹고사는 문제가 최소한 몇 년은 해결되기를 간절히 바라왔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뱃님이 마을을 찾아오는 건 무척이나 드문 일입니다. 때론 몇 년씩 건너뛸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면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가족 중 누군가를 이웃마을의 고용하인으로 보내야만 합니다. 안 그러면 굶어죽는 건 시간문제이기 때문입니다.
9살 이사쿠가 세 번의 겨울을 지나는 동안 두 번의 뱃님을 맞이하는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이사쿠는 첫 뱃님과의 조우에서 배의 난파에 환호하고, 파선에서 획득한 식량과 재물에 눈물 흘리며, 파선의 생존자들이 마을사람들에 의해 입막음 당하는 걸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죽느냐 사느냐의 경계선에 선 자들에겐 도덕이나 윤리 따윈 애당초 관심 밖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상황은 ‘극한상황에서 인육을 먹은 자들에 관한 논쟁’보다 더 극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은 우연히 난파된 배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명백히 난파를 유도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쿠와 마을사람들의 3년의 시간을 지켜보는 동안 단 한 순간도 이들을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왜 뱃님이 빨리 안 오시나, 초조하게 기다리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작가가 그린 이사쿠 마을의 비참함과 위기감이 생생했기 때문입니다.
이사쿠와 마을사람들의 ‘뱃님 기다리기’가 결코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을 거란 건 초반부터 직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낭만적이고 정감 어린 ‘뱃님 오시는 날’이라는 부제가 실은 이사쿠와 마을사람들이 겪게 될 끔찍하고 비극적인 운명에 대한 예고라는 것도 쉽게 눈치 챌 수 있습니다. 그래선지 페이지를 넘길수록 부디 이들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이라는 바람을 품게 되는데, 동시에 한편에선 오래전부터 태연히 자행되어 온 이 풍습이 과연 아무런 징벌 없이 계속 이어져도 될까, 라는 착잡한 생각이 든 것도 사실입니다.
240페이지의 짧은 분량이지만 주제와 서사의 무게감은 수백 페이지의 장편에 버금갑니다. 극적인 반전도 없고, 소름 돋게 만드는 공포 코드도 없지만 ‘일본 기록문학의 대가’가 담담하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그려낸 이사쿠와 마을사람들의 ‘뱃님 기다리기’는 독자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들고, 오랫동안 잊히지 않을 여운을 선사하기 때문입니다. 이 특별한 매력을 많은 독자들이 공유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족으로... 아직 이 작품을 읽지 않은 독자라면 인터넷서점의 소개글을 읽지 말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어촌 마을의 기괴한 풍습이 초래한 잔혹 재앙의 시작’이라는 카피까지는 괜찮지만 줄거리를 소개한 글에는 스포일러에 가까운 내용까지 포함돼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