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베일
오츠이치 지음, 김수현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9년 8월
평점 :
품절
‘베일’은 ‘여름과 불꽃과 나의 사체’로 17세에 데뷔한 오쓰이치가 두 번째로(문고판 기준 2001년) 발표한 단편집입니다. 원제는 수록작 중 한 편인 ‘천제요호(天帝妖狐)’인데, 한국 독자에겐 좀 어렵고 낯선 제목이라 그런지 수록작들을 관통하는 개념인 ‘베일’이라는 제목을, 그리고 ‘저 너머, 바라보아서는 안 될 그것’이라는 특이한 부제를 붙인 것 같습니다.
각각 100페이지 안팎인 두 개의 단편이 수록됐는데, ‘천제요호’는 오쓰이치가 야마시로 아사코라는 필명으로 낸 ‘이즈미 로안 시리즈’에서 맛봤던 특유의 기괴하면서도 서글픔이 배어있는 호러물이고, ‘A MASKED BALL’은 고등학교 화장실에 적힌 의문의 낙서에서 시작되는 도시괴담에 가까운 미스터리입니다.
①천제요호
친구도 형제도 없이 외롭게 지내던 11살 소년 야기는 홀로 코쿠리상(일종의 초혼술, 한국의 ‘분신사바’와 유사한 놀이)을 하던 중 사나에라는 귀신과 소통하게 됩니다. 어느 날 친구의 죽음을 목격한 야기는 말할 수 없는 공포에 휩싸이는데, 그 순간 사나에는 야기의 귀가 솔깃할 만한 달콤한 제안을 건네옵니다.
“그럼 내 아이가 돼. 그러면 영원한 생명을 줄게. 몸을 나에게 넘겨. 대신 더 튼튼한 몸을 줄게. 그러면 너는 나이도 먹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을 거야.”
②A MASKED BALL
교내 외딴 화장실을 흡연실로 애용하던 우에무라는 어느 날 “낙서하지 말라”는, 정자체로 쓰인 이상한 낙서를 발견합니다. 낙서를 금지하는 그 낙서 옆에 다른 학생들이 댓글처럼 낙서를 적으면서 화장실은 서로 누군지 모르는 학생들끼리 낙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공간으로 변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정자체’는 교칙을 어기거나 무례한 짓을 벌이는 자를 ‘배제’하겠다는 낙서를 남겼고, 실제로 그 ‘배제’는 무자비한 방법으로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이 학교에는 깡통이 너무 많다.”
“학교에는 질서를. 그것이 나의 흔들리지 않는 바람.”
“새로운 죄가 발각. 나는 OOO를 학교에서 배제할 것이다.”

오쓰이치가 20대 초반에 발표한 초기작이지만, 두 작품 모두 이후에 출간된 그의 명품들에 깃든 매력과 미덕을 품고 있습니다. 특히 ‘천제요호’는 오쓰이치의 여러 경향 가운데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코드들(한마디로 요약하면 ‘애틋한 호러’)로 채워져 있는데다 영상물에 더없이 잘 어울리는 이야기라 더욱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100여 페이지에 불과한 분량이지만 그 몇 배의 묵직함과 공포와 여운을 맛볼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도시괴담과 진범 찾기 미스터리가 뒤섞인 ‘A MASKED BALL’은 오쓰이치의 으스스한 장난끼가 잘 배어있어서, 가볍게 읽히면서도 내내 서늘함을 느낄 수 있는 작품입니다.
‘베일’에 대해 더 알아보기 위해 일본 위키피디아를 검색해보니 오쓰이치는 최근까지도 활발하게 작품을 내고 있었습니다. (2024년 9월 ‘大樹館の幻想’ 출간) 하지만 그에 비해 한국 출간소식은 (여러 필명을 통틀어도) 너무 빈약하고 뜸해서 저 같은 팬들에겐 그저 아쉬울 수밖에 없습니다. 개인적인 바람이라면 오쓰이치의 작품이든 야마시로 아사코의 작품이든 2025년에 한 편쯤은 꼭 출간됐으면 하는 건데, 그리 낙관적이진 않지만 그래도 기대를 걸어보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