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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팅 데이
이현진 지음 / 아프로스미디어 / 2024년 9월
평점 :
어린 시절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 트라우마 때문에 지금도 상담과 함께 수면제 처방을 받는가 하면 재직 중인 초등학교에선 고참 교사들의 갑질에 순응하는 등 정희태는 외양만 놓고 보면 매가리 하나 없는 유약한 청년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실은 그는 13살 때 첫 살인을 저지른 것을 시작으로 한 달에 한 번씩 죽여 마땅한 사람들을 거리낌 없이 제거하는 사이코패스입니다. 어느 날, 살인을 목전에 둔 정희태는 뜻밖의 방해꾼 때문에 모든 일을 망치고 맙니다. 얼마 후 방해꾼의 정체를 알아낸 정희태는 그를 처리할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리지만 예기치 못한 사태가 벌어지면서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지고 맙니다.

“세상에 숨어 사는 괴물들을 제물로 바침으로써 나는 내가 세상에 이로운 존재라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내가 세상을 매일매일 조금씩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p82~83)
미드 ‘덱스터’가 사적 제재와 사적 복수 서사의 원형까지는 아니지만 매체를 불문하고 수많은 ‘후예들’을 양산한 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법망을 빠져나간 범죄자들이나 죄를 짓고도 벌을 받지 않은 자들에 대한 주인공의 무자비한 제재와 복수는 언제나 관객과 독자의 환영을 받았고, 이루 말할 수 없는 쾌감까지 선사했기 때문입니다. 유사한 스토리가 반복적으로 재생산되면서 더는 예전과 같은 신선함이나 짜릿함을 만끽하기 어려워졌지만, 여전히 사적 제재와 사적 복수는 스릴러의 매력적인 소재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치팅 데이’ 역시 ‘덱스터의 후예들’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는 한국형 사적 제재 스릴러입니다. 주인공 정희태는 반쯤은 타고 났고 반쯤은 후천적으로 숙성된 사이코패스입니다. 그는 ‘자신과 세상을 속여도 되는 날’, 즉 치팅 데이라는 규칙을 세워놓곤 한 달에 한 번씩 ‘박멸되어야 하는 벌레 같은 존재들’을 눈앞에서 치워 버리곤 합니다. 굳이 치팅 데이라는 규칙을 정한 건 살인에 탐닉하는 괴물이 되지 않도록 스스로를 억제하기 위함입니다. 그런 정희태 앞에 어느 날 갑자기 방해꾼이 나타나면서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합니다. 둘 중 하나가 죽어야만 끝나는 게임이 시작되고, 그 게임의 와중에 적잖은 사람들이 끔찍한 비극을 맞이합니다.
‘한국판 덱스터의 탄생’이라는 노골적인 띠지를 두르긴 했지만 ‘치팅 데이’는 결론부터 말하면 개성과 특징이 희미한 ‘덱스터의 모방작’에 가까운 작품입니다. 읽기 전부터 염두에 둔 건 “기존의 유사한 작품들과 차별되는 지점은 어디인가?”였는데, 거의 유일하다고 할 수 있는 건 목적도 동기도 다른 ‘라이벌 살인마’가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정희태와 라이벌의 대결이 ‘치팅 데이’의 중심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 외엔 ‘덱스터의 후예’ 정희태를 기억하게 할 만한 특별한 개성이 없었다는 게 솔직한 제 생각입니다.
치팅 데이라는 독특한 ‘괴물 방지 장치’가 설정되긴 했지만 실은 그건 방법론의 차이일 뿐 근본적인 차별점은 아닙니다. 또한 정희태는 ‘자신만의 도덕 기준’, 즉 죽여 마땅한 자들을 선정하는 기준을 여러 번 강조하는데, 그 기준이란 지금까지 보고 읽은 것들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정희태는 엔딩과 에필로그에서 스스로에게 도덕적 질문 - 자신의 행동이 과연 정당화될 수 있는지, 자신의 방식이 진정한 정의를 실현하는 것인지 - 을 던지는데, 이는 캐릭터를 차별화시킨다기보다는 오히려 무색무취하고 평범하게 만든 어설픈 질문이란 생각입니다. (이 장면에선 개인적으로 ‘덱스터의 후예들’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피터 스완슨의 ‘죽여 마땅한 사람들’의 주인공 릴리 킨트너가 많이 생각났습니다)
유사 작품들과의 차별성만큼 아쉬웠던 건 스릴러 서사를 떠받치는 디테일한 장치들이 너무 쉽고 안이하게 설정됐다는 점입니다. 사이코패스의 연원을 ‘불행한 가족사’라는 편리한 장치에만 의존합니다. 두 사람이 서로의 정체를 파악하는 과정은 웃음이 나올 정도로 쉽습니다. 두 사람의 살인 행각은 CCTV와 블랙박스를 잘도 피해 다닙니다. 위기일발의 순간마다 끼어드는 제3자의 반격은 거의 닌자 혹은 투명인간 수준입니다. 사소하다면 사소한 문제일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론 이런 디테일이야말로 스릴러 서사 자체를 강력하게도, 허약하게도 만들 수 있는 중요한 토대라는 생각입니다.
‘덱스터의 후예들’을 자처하는 작품이라면 오히려 ‘덱스터와 차별되는 지점’을 내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권총 한 번 쏘기도 쉽지 않은 한국 스릴러의 현실을 감안하면 디테일은 몇 번을 강조하고 신경 써도 지나치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다른 건 몰라도 두 가지 미덕에 관한 한 ‘치팅 데이’는 아쉬움이 크게 남을 수밖에 없는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