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스팅 - 그가 사라졌다
리사 엉거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시간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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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 그린우드는 불행한 과거를 딛고 인기 있는 칼럼니스트로 살아가는 중이다. 연애에 서툰 그녀는 데이트 앱을 통해 애덤을 만나 열정적인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렌이 자신의 불행했던 과거를 털어놓은 다음날, 애덤은 갑자기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렌은 사설탐정 베일리에게 애덤과 사귀었던 세 명의 여자들이 모두 실종됐다는 놀라운 이야기를 듣는다. 애덤의 흔적을 쫓던 렌은 그가 이미 자신의 과거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에 빠진다. 애덤은 혹시 자신의 과거 때문에 일부러 접근한 걸까? 실종된 세 명의 여자들에겐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애덤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렌은 자신의 과거로 이어지는 단서를 쫓아 애덤을 추격하기 시작한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배우자 또는 연인이 갑자기 사라지거나 알고 보니 지금까지 그()에 대해 알고 있던 모든 것이 거짓이란 설정은 도메스틱 혹은 심리 스릴러의 단골 소재입니다. 피로감이 느껴질 정도로 여러 작품에서 활용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스팅을 읽기로 한 건 리사 엉거의 전작인 ‘745분 열차에서의 고백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입니다.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사건보다 캐릭터의 힘으로 끌고 간 작가의 필력은 대단해 보였다.”라는 서평을 남기기도 했는데 고스팅역시 미스터리와 스릴러 서사보다는 개성 강한 인물들의 다채로운 심리가 더 눈길을 끈 작품입니다.

 

20대 후반인 렌은 어린 시절 가족의 파멸을 생생히 지켜봤던 트라우마를 가진 인물입니다. 그런 트라우마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다른 사람들의 고민을 상담해주는 디어 버디라는 블로그와 팟캐스트를 운영하며 나름 긍정과 희망의 기운 속에 살아가는 중입니다. 하지만 그런 그녀가 데이트 앱에서 만나 사랑에 빠진 상대는 다소 어둡고 불운해 보이는 남자 애덤입니다. 밝고 가볍고 유머 감각이 있는 남자보다 어딘가 자신의 과거와 닮은 애덤에게 끌린 건데, 그 때문인지 렌은 절친 한 명 외엔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는 자신의 고통스러운 과거를 아무 거리낌 없이 털어놓고 맙니다.

문제는 그 직후 애덤이 사라졌다는 점, 그의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는 점, 그리고 그와 만났던 세 명의 여자들이 실종됐으며 그녀들은 렌과 마찬가지로 불행한 과거와 평균 이상의 재산을 보유한 공통점이 발견됐다는 점입니다. 가장 당혹스러웠던 건 애덤이 오래 전부터 자신의 트라우마와 과거사를 모두 알고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애덤이 애초 자신에게 접근한 이유가 어쩌면 과거사 속에 숨어있을지도 모른다는 근거 없는 추정인데, 이 때문에 이야기는 사라진 애덤 찾기봉인했던 과거와의 고통스런 조우라는 두 갈래로 전개됩니다.

 

실종된 여성 중 한 명의 부모에게서 의뢰를 받은 사설탐정 베일리와 렌이 함께 애덤의 흔적을 뒤쫓는 미스터리와 20여 년 전 렌과 그녀의 가족이 겪은 끔찍한 비극이 번갈아 등장하는데, 비교적 단선적인 미스터리 구도에도 불구하고 500페이지 가까운 분량의 밀도와 농도가 진하게 느껴진 건 각 인물들의 복잡하고 요동치는 심리 묘사 덕분입니다. 특히 지독한 상처와 트라우마에도 불구하고 그와 비슷한 기운을 발산하는 애덤에게 이끌렸던 렌에게선 자기 파괴적이고 집착에 가까운 사랑과 열정을 느낄 수 있는데, 그가 사라진 뒤에도, 또 그가 세 명의 여성의 실종에 혐의가 있어 보인다는 사실을 알고도 그에 대한 갈망을 포기하지 못하는 렌에게선 이성과 상식으로는 설명할 길 없는 사랑의 광기 같은 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마치 전쟁터에서 큰 트라우마를 입은 인물이 결국은 다시 전쟁터를 갈망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랄까요?

 

애덤을 쫓는 렌과 베일리의 추적 미스터리 자체는 딱히 두드러지거나 인상적인 대목은 없습니다. 오히려 작은 단서들이 드러날수록 봉인했던 과거와 직면하게 되는 렌의 고통과 그런 렌에게 연민과 공감을 느끼는 베일리의 복잡한 심경이 더 눈길을 끕니다. 또한 애덤을 찾아내 실종 여성의 행적과 생사를 알아내려는 베일리와 달리 렌의 목적은 애덤과의 사랑을 재확인하고 다시금 행복한 나날을 되찾는 것이기에 두 사람 사이엔 협력보다는 긴장감이 상존할 수밖에 없고 이런 설정은 마지막까지 독자의 마음을 뒤흔들어놓습니다.

 

똑같은 이야기를 일본 미스터리 스타일로 풀었다면 무척 단선적인 이야기가 됐겠지만, 리사 엉거는 특유의 집요하고 섬세한 묘사를 앞세워 말 그대로 쫄깃한 심리 스릴러를 완성시켰습니다. 물론 상식과 이성으론 이해하기 힘든 렌과 애덤의 심리가 간혹 위화감을 자아낸 건 사실이지만, 렌의 끔찍한 과거사와 막판에 밝혀진 진실 덕분에 어느 정도는 눈감아 줄 수 있었습니다. 도메스틱 혹은 심리 스릴러에 거부감이 있는 독자라도 충분히 그 재미를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이니 관심 있는 독자라면 한번쯤 만나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사족이지만, ‘고스팅을 끝까지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던 건 번역이란 이런 것!”이란 걸 여러 번 실감하게 해준 이은선의 매끄럽고 완벽한 번역 덕분입니다. 심리 묘사에 치중한 작품이라 번역가에겐 쉽지 않은 작업이었을 텐데 주로 스티븐 킹의 작품에서 선보였던 이은선의 저력이 고스팅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됐다는 생각입니다. 책을 고르는 데 있어 누가 번역했는지도 꽤 중요하게 여기는 제겐 이은선은 모든 애서가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번역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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