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가와 란포 기담집
에도가와 란포 지음, 김은희 옮김 / 부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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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미스터리 마니아라면 언젠가 에도가와 란포의 작품을 출간 순서대로 읽어보고 싶은 욕심이 들 것입니다. 알라딘에서 검색하면 모두 56편의 작품이 한국에 출간된 걸로 나오지만 아케치 고고로 시리즈를 제외하면 약간은 중구난방의 느낌이 드는 게 사실이고, 체계적으로 그의 작품세계를 정리했다기보다는 독자의 관심을 살 만한 중단편들이 중복 출간된 경우가 더 많아서 마니아의 욕심을 충족시키기 어려워 보이곤 합니다. 2016년에 검은숲에서 에도가와 란포 결정판을 내놓긴 했지만 2편까지만 나오곤 소식이 끊겨서 무척 아쉬웠는데, 오랜만에 다수의 수록작을 품은 에도가와 란포 기담집이 출간돼서 반가운 마음으로 읽게 됐습니다.


 

모두 16편이 수록됐지만 거의 절반 가까이는 이미 다른 중단편집을 통해 소개된 작품들입니다. 특히 애벌레’, ‘인간 의자’, ‘거울 지옥등은 두세 편 이상의 중단편집에 중복 수록됐던 인기작들인데, 오랜만에 다시 읽어도 여전히 에도가와 란포 특유의 기괴함과 그로테스크한 마력을 만끽할 수 있어서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란성 쌍둥이 형을 죽이고 형 행세를 하며 살인을 저지른 남자의 참회록(쌍생아), 법을 어기지 않고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 뒤 99명의 목숨을 빼앗은 남자(붉은 방), 아내를 살해하고 토막 내어 시랍으로 만든 약사(백일몽), 자신이 만든 의자 속에 숨어들어가 가죽 한 장 사이로 타인의 몸과 접촉하는 것에 도취든 장인(인간 의자), 사람들의 무시와 핍박 속에 살인귀로 전락해버린 난쟁이 광대(춤추는 난쟁이), 결혼 6개월 만에 차갑게 변한 남편의 비밀을 캐다가 참혹한 비극과 마주하고 만 여자(사람이 아닌 슬픔), 전쟁 중에 팔과 다리를 잃고 오직 시각과 촉각만 남은 전직 군인 남편을 추악한 욕정의 도구이자 가학적 학대의 대상으로 이용하는 여자(애벌레) 등 상상을 초월하는 인물과 이야기가 기담과 괴담 혹은 호러와 미스터리 서사에 실린 채 예측 불가능한 엔딩을 향해 폭주하면서 독자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에도가와 란포의 진짜 매력은 전대미문의 기괴함이나 무한대로 일그러진 그로테스크 그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독자는 각 수록작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마다 서로 다른 색깔의 특별한 여운을 맛보게 되는데, 제 경우 앞서 읽은 끔찍한 이야기에서 어떻게 이런 여운이 파생될 수 있을까, 라는 혼란과 이질감을 느끼다가 금세 이것이 에도가와 란포만의 매력이라는 결론에 이르곤 했습니다. 실제로 수록작 중 상당수는 단순히 무섭고 끔찍한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곳곳에 말로 다 표현 못할 처연함과 애틋함을 품고 있습니다. 심지어 요즘의 시선으론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범죄와 악의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주인공에게 이입된 나머지 용서하거나 응원하거나 모르는 척 해주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드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물론 악마 그 자체를 적나라하게 그려내서 다 읽은 뒤 지독한 혐오감에 빠지게 만드는 작품도 있습니다)

 

요즘 독자의 트렌드로 볼 때 에도가와 란포의 작품은 출판사에겐 바람직한 비즈니스 대상이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언젠가 그의 작품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결정판이 시리즈로 출간되기를 복권을 사는 마음으로 기대해보고 싶습니다. 특히 정치적 상황 때문에 다소 말랑말랑한 작품(‘아케치 고고로 시리즈)을 쓸 수밖에 없게 된 1936년 이전의 작품들이라면 언제라도 두 손 들어 환영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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