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쿠치바 전설
사쿠라바 가즈키 지음, 박수지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10월
평점 :
절판


내 남자’, ‘토막 난 시체의 밤’, ‘소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직업등 읽은 작품 모두 독특한 느낌과 여운을 남겨줬던 사쿠라바 카즈키의 2006년 출간작입니다. 이 작품은 2007‘60회 일본추리작가 협회상을 수상했지만 추미스 독자들이 기대하는 일반적인 추리소설은 아니라서 사전 정보 없이 읽을 경우 살짝 당황할 수도 있습니다. 아주 간략하게 요약하면 아카쿠치바 전설은 패전 직후부터 2000년대 초반에 이르는 60여년에 걸쳐 돗토리 현 베니미도리 촌에서 제철업의 흥망성쇠를 겪은 아카쿠치바 가문의 여성 3대의 연대기입니다. 패전 무렵 태어나 업둥이로 자랐으며 환시(幻視)와 미래시(未來視)의 능력을 지녔던 만요, 거품경제의 극치를 달리던 80년대에 전국적으로 악명을 떨치던 폭주족이었다가 소녀만화가로 변신하여 불꽃같은 삶을 살았던 게마리, 그리고 할머니와 어머니와는 달리 무기력하게 젊음을 소진하며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도코 등 전혀 다른 삶을 살았던 세 명의 여성이 자신이 살던 시대의 변화상과 아카쿠치바 가문에서 벌어진 갖가지 사건들을 담담하게 들려줍니다.


 

아카쿠치바(赤朽葉, 붉은 고엽)라는 가문 이름답게 건물과 정원 모두 짙은 붉은색으로 뒤덮인 대저택을 무대로 한 여성 3대의 이야기는 한 개인의 굴곡진 삶뿐 아니라 패전-고도성장-거품경제에 이르는 일본의 현대사까지 담아내고 있어서 말 그대로 대하드라마와 같은 무게감과 깊이를 갖고 있습니다.

 

환시(幻視)와 미래시(未來視)의 능력을 지닌 만요는 패전 직후부터 1975년까지의 이른바 최후의 신화시대의 표상입니다. 지금은 존재 여부조차 확실치 않은 산속의 은거자들의 후손으로 피부색이며 머리칼이며 보통 일본인과는 사뭇 달랐던 만요는 업둥이로 자라다가 기구한 인연으로 인해 아카쿠치바 가문의 며느리가 됩니다. 그녀가 지닌 신비한 능력과 최전성기를 구가하던 아카쿠치바 가문의 범상치 않은 분위기 덕분에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에선 최후의 신화시대라는 부제에 걸맞게 매력적인 판타지 서사를 만끽할 수 있습니다.

 

만요의 딸 게마리는 1979년부터 1998, 그러니까 고도성장과 거품경제의 붕괴라는 롤러코스터 같았던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명문가의 차녀였지만 게마리는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폭주족 리더이자 쇠파이프 싸움을 마다하지 않는 으로 세상에 그 이름을 알립니다. 오늘이 행복하다면 내일 죽어도 좋다는 청춘예찬론을 펼치며 거침없이 살아가던 그녀는 뜻밖의 비극을 겪은 뒤 갑자기 소녀만화가로 변신하고 그야말로 짧지만 굵게 불꽃처럼 살아갑니다. 자신이 살던 격동의 시대와 꼭 닮았던 게마리의 삶은 만요의 판타지 서사와는 정반대로 지독한 사실주의에 입각하여 그려집니다.

 

게마리의 딸 도코는 변화무쌍한 시대에 태어나 극적인 삶을 살았던 할머니 만요나 어머니 게마리와는 너무나도 다른 인물입니다. 2000년대 초반 일본 청춘들의 모습을 대변하는 도코에게선 그저 무기력함밖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런 도코에게 주어진 미션은 할머니 만요가 죽기 전에 남긴 마지막 한마디 - “내가 옛날에 사람을 한 명, 죽였어.” - 의 진실을 밝히는 일입니다. 60여년에 걸쳐 아카쿠치바 가문에선 여러 사람이 다양한 형태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하지만 도코가 알기로는 그 가운데 살인의 가능성이 있는 죽음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요의 고백에 담긴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도코는 과거의 죽음들을 모조리 소환합니다. 그리고 결국 만요가 오랜 시간 홀로 감내했던 비극의 실체와 마주하게 됩니다. 이 작품의 미스터리 서사는 만요에 의해 시작되고 도코에 의해 완성되는 것입니다.

 

‘200760회 일본추리작가 협회상수상 이력만 믿고 이 작품을 읽은 독자라면 다소 배신감(?)이 들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론 그런 오해 덕분에 아카쿠치바 전설을 읽게 돼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입니다. 물론 수상 이력이 아니더라도 표지와 제목이 호러의 분위기를 내뿜는데다 사쿠라바 카즈키의 작품이란 이유만으로 어떻게든 읽었을 작품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각각 신화의 시대, 풍요와 붕괴의 시대, 무기력의 시대를 살았던 아카쿠치바 여성 3대를 그린 아카쿠치바 전설은 한두 줄로 그 매력을 요약하기가 어려운 작품이며, 특히 굴곡진 개인의 삶과 격변기를 통과하는 시대상을 한꺼번에 맛보고 싶은 독자에겐 적극적으로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기도 합니다. 사쿠라바 카즈키에게 한번쯤 매료된 적 있는 독자라면 이 묵직하고도 기이한 이야기에 도전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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