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트 플라이트
줄리 클라크 지음, 김지선 옮김 / 밝은세상 / 2024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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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가 출신 예비정치인의 아내로 모두의 부러움을 샀지만 실은 지독한 가스라이팅과 가정폭력에 시달리던 클레어 쿡은 오랜 준비 끝에 신분을 바꾸고 종적을 감추기로 결심합니다. 한편 대학에서 퇴교당한 뒤 12년 넘게 마약 조직에 얽혀있던 이바 제임스는 마약단속국의 미행과 조직의 의심 속에 위기를 느끼곤 고향으로 도망치기로 결심합니다. 일면식도 없던 클레어와 이바는 우연히 공항에서 마주쳤고, 피치 못할 이유 때문에 서로의 항공권은 물론 옷과 휴대폰과 신분증 등 지니고 있던 모든 것을 바꿔치기합니다. 그리고 각자가 간절히 원했던 자유로운 삶을 향해 비행기에 오릅니다. 하지만 운명은 결코 두 사람의 뜻대로 흘러가주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 서사와 소재가 믹스된 매력적인 스릴러입니다. 가스라이팅, 가정폭력, 마약, 불행한 가족사가 남긴 상처, 신분 바꾸고 종적 감추기, 여성들의 연대와 저항 등 쉽게 섞이기 어렵지만 제대로만 섞인다면 시너지 효과가 대단할 수밖에 없는 재료들이 한 바구니에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클레어와 이바가 공항에서 항공권을 바꿔치기 한 직후 이야기는 두 갈래로 갈라집니다. 무사히 이바의 집에 몸을 숨기긴 했지만 끊임없이 찾아오는 위기 때문에 줄타기를 하듯 아슬아슬한 시간을 보내는 클레어의 이야기가 하나이고, 또 하나는 이바의 과거사로, 수녀원에 버려진 유년기부터 퇴교 직후 마약조직에 얽혔던 12년 전을 거쳐 공항에서 클레어를 만나기 직전까지의 기구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입니다.

 

클레어의 이야기가 언제 남편에게 발각될지 모른다는 공포와 한치 앞도 안 보이는 미래에 대한 막막함을 통해 독자의 긴장감을 고조시킨다면, 이바의 과거사는 한 사람의 인생이 얼마나 쉽고 어이없게 궤도를 이탈해 막장에 처박힐 수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줘서 안쓰러움과 애틋함을 자아냅니다. 또한 장밋빛 미래를 꿈꾸던 젊은 날의 두 사람이 불과 30대에 이르러 자유로운 삶을 찾아 신분을 바꾸고 종적을 감추기로 결심하는 데 이르는 과정은 독자의 공분을 사기에 충분하고도 남을 정도입니다.

 

클레어의 현재와 이바의 과거가 교차되면서 점차 클라이맥스로 치닫는 지점에서 독자는 궁금증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두 사람의 계획은 성공할까? 자신들의 삶을 엿 먹인 자들에게 통쾌한 복수를 가할 수 있을까? 두 사람은 극적으로, 그것도 웃는 얼굴로 다시 한 번 만날 수 있을까? 작가는 여기저기 크고 작은 지뢰밭을 만들어놓고 궁금증에 사로잡힌 독자를 희롱합니다. 일부 궁금증은 클라이맥스 즈음에 풀리지만, 결정적인 궁금증은 마지막 에필로그에 이르러서야 해소됩니다. 제 경우 에필로그를 읽곤 이해가 잘 안돼서 잠시 멍~했던 게 사실인데, 5분쯤 지난 후 다시 한 번 에필로그를 읽은 뒤에야 제대로 된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동안 아주 특별한 감정에 푹 빠졌습니다. 압권 혹은 반전까지는 아니어도 이 작품을 오랫동안 기억하게 만들, 그런 멋지고도 애틋한 에필로그였기 때문입니다.

 

매력적인 소재와 서사들이 잘 섞인 데다 긴장감과 속도감도 적절해서 마지막 페이지까지 금세 달릴 수 있었지만, 중반 이후 살짝 늘어지는 대목들 때문에 별 0.5개를 뺐습니다. 다만 이 대목들 대부분은 클레어와 이바에게 있어 무척 중요한 과거사, 즉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서 대충 읽어 넘길 수는 없었습니다. 분량이 좀 많아 보였고 비슷한 내용이 반복된 점이 아쉽긴 했지만 말입니다.

아울러 클레어와 이바에게 수호천사처럼 등장한 뜻밖의 조력자들의 존재도 조금은 작위적으로 보였습니다. 그들 중 누구 하나라도 없었다면 두 사람의 운명은 전혀 달라졌을 텐데 그만한 존재감치곤 너무나도 우연히, 너무나도 적절한 타이밍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 등장한 방식이 썩 내키지 않았다고 할까요?

 

몇 가지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재미와 의미와 여운을 함께 맛볼 수 있는 작품이라 주위에도 추천하고 싶은 작품입니다. 출판사 소개글을 보니 줄리 클라크의 다른 작품들도 해외에서 좋은 평을 들었던데, ‘라스트 플라이트가 한국에서 선전을 거둔다면 머잖아 그 작품들도 읽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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